한국 주식시장은 ‘불법 공매도’ 트라우마를 겪어왔다. 셀트리온 HLB 등은 불법 공매도와의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다. 무차입 공매도로 주가가 억눌리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주주 모임은 불법 공매도 조사를 촉구하는 의견 광고를 신문에 내기도 했다. HLB 주주연대는 각종 불법 공매도 의혹을 제기하면서 내부고발 포상금 1억원을 내걸기도 했다.
하지만 불법 공매도의 실체는 잡히지 않았다. 그동안 공매도 위반 사례는 대부분 직원 실수나 시스템 오류로 인한 것이었다. 장기간 상습적으로 벌어진 무차입 공매도가 적발된 일은 없었다. 이번에 금융당국이 적발한 글로벌 투자은행(IB)의 관행적 불법 공매도는 그동안 시장에서 제기된 불법 공매도 의혹 일부를 뒷받침해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공매도한 뒤 사후 차입
15일 금융감독원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번에 적발된 글로벌 IB들은 주식매매 결제일이 매매체결 이틀 후라는 점을 악용해 무차입 공매도를 했다. BNP파리바 홍콩법인은 내부 부서끼리 주식을 차입하는 구조를 악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가령 특정 주식 100주를 보유한 A부서가 B부서에 50주를 빌려주고, 내부 차입 내역을 기록하지 않은 채 사내 주식 보유 잔량을 150주로 인식하는 식이다. BNP파리바는 이렇게 중복 계산한 주식 수를 바탕으로 공매도 주문을 제출했다. 주문 다음날부터 실제 주식 잔량과 공매도 체결 수량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별다른 조치 없이 사후에 주식을 추가로 빌려 부족한 수량을 채웠다. BNP파리바가 조사 기간인 2021년 9월부터 작년 5월까지 가장 많이 불법 공매도한 주식은 카카오였다. 카카오 주가는 해당 기간 약 47% 급락했다.호텔신라 등 9개 종목에 대해 160억원 규모의 무차입 공매도를 해 적발된 홍콩 HSBC의 수법도 비슷했다. 향후 차입이 가능한 주식 수량 기준으로 공매도 주문을 넣는 행위를 상습 반복했다. HSBC는 주로 해외 기관투자가들로부터 받은 총수익스와프(TRS) 주문을 헤지하기 위해 선 공매도, 후 주식 차입을 되풀이했다. 김정태 금감원 부원장보는 “주문 이틀 후인 결산일까지 수량을 맞추지 못했다면 진작 문제가 드러났겠지만, 대형 글로벌 IB다보니 번번이 사후 수량을 맞췄기 때문에 그간 위법행위를 인지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불법 공매도 방식은 그동안 국내 상장사 경영진이나 주주들이 제기한 ‘변종 공매도’ 의혹과 맥이 닿는다.
◆“유사한 불법 행위 더 많을 것”
금감원은 이들 회사가 수수료 수익을 확대하기 위해 불법 공매도를 인지하고도 방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공매도 가능 물량을 부풀리면 기관투자가와 스와프 계약을 더 많이 체결할 수 있어 수수료를 늘릴 수 있다. 주식을 미리 확보하지 않은 채 최종 주문 체결량에 따라서만 사후 차입하면 차입 비용도 줄어든다. 이승우 금감원 조사2국장은 “IB는 중개 역할만 하고 주가 변동에 따른 손익은 실제 공매도 투자자에게 귀속되는 스와프 구조”라며 “IB가 시세 차익까지 노린 것은 아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각 사의 개별 종목 공매도 수량은 해당 종목의 전체 거래량에 비해 비중이 크지 않다”며 “특정 종목 주가 하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BNP파리바와 HSBC는 위법행위를 인정했다. 조사 이후 HSBC는 차입이 확정된 수량을 기준으로 매도 스와프 계약을 체결하고, 이 수량만큼만 공매도 주문을 할 수 있게 시스템을 개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은 BNP파리바와도 시스템 개선 방향 등을 논의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제재 수위는 금감원 자본시장조사심의위원회와 금융위원회 증권선물위원회 심의·의결 후 확정된다.
금감원은 주요 글로벌 IB와 국내 증권사의 각종 프라임브로커리지서비스(PBS) 공매도 업무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계획이다. 김 부원장보는 “일부 증권사에서 장 개시 전 차입 주식 수보다 많은 수량을 매도하는 등 장기간 자본시장법을 위반한 정황이 발견돼 조사하고 있다”며 “주문을 받아주는 국내 수탁 증권사가 문제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조력했는지도 따져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 무차입 공매도
주식을 빌려놓지 않고 하는 공매도. 빌린 주식을 팔고 나중에 매입해서 갚는 ‘차입 공매도’와 구분된다. 실제 보유하지 않은 주식을 팔기 때문에 시장 교란 우려가 있어 한국에선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선한결/성상훈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