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시대에 맞춰 끊임없이 변해야 살아남는다. 동양화도 예외는 아니다.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인왕제색도’는 지금도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지만, 2023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작가가 그 기법과 표현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한다면 구닥다리 취급을 받을 뿐이다. 수많은 동양화가가 ‘현대적 동양화’를 추구하며 여러 시도를 거듭해온 건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 같은 도전은 지난 수십 년간 별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게 미술계의 냉정한 평가다. ‘텃밭’인 국내에서도 동양화는 서양화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미술시장을 이끌어갈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동양화는 한물간 그림’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게 현실이었다.
최근 들어 이런 기류가 바뀌고 있다. 정통 동양화에 현대적인 감각을 접목해 주목받는 화가가 하나둘 늘어나면서다. 그 맨 앞에 이정배(사진)·이진주 작가 부부가 섰다. 이진주는 지난 9월 화이트큐브 한국 지점의 개관전에 유일한 한국 작가로 참여하고 프리즈 서울의 아라리오갤러리 부스에서도 첫날 작품을 ‘완판’하면서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이정배 역시 다양한 재료와 표현 기법으로 ‘현대 한국의 산수화’를 그려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열리는 개인전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다.
통상의 동양화를 생각하고 전시장에 들어서면 당황할 수도 있다. 기묘한 모양의 색면(色面)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독일의 이미 크뇌벨 등 색면을 즐겨 쓰는 서양 추상미술가의 이름이 연상되는 그림들이다. 이정배가 홍익대 동양화과에서 정통 동양화를 배웠고, 학부생 시절부터 ‘난 치는 실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의문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듣고 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학부생 때부터 ‘지금 이 시대의 산수화’가 무엇인지를 계속 고민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산의 모습을 보고 ‘이거다’ 싶었습니다. 이렇게 ‘작게 조각난 산’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산수화라고 하면 산과 물만 그리는 그림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자연과 어우러진 인간을 그리는 그림이에요. 조선시대 산수화에도 사람과 집이 항상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산수화는 이렇게 빌딩 숲 사이로 보이는 산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전시장 가운데 솟아 있는 초록색 기둥 모양의 작품 ‘빛의 산’이 그런 작품이다. 건물 사이로 보이는 산을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언뜻 보면 단순히 초록색 물감을 들이부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미묘하게 깊은 색감이 느껴진다. 작가는 “1000번 넘게 색을 칠하고 사포로 갈아 만들어낸 색”이라며 “서양미술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같은 색을 여러 번 칠해 작품을 완성하는 동양화 기법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노란색 작품 ‘찬란한 햇빛’은 빌딩 뒤로 저무는 해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빛이 꺾이는 회절 현상까지 반영했다.
전시 대표작은 금과 은을 사용해 만든 ‘금의 인왕산’과 ‘은의 인왕산’. 작품만 보면 그저 작은 금속 조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도심 건물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인왕산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귀금속을 재료로 사용한 이유를 묻자 “빌딩 숲속에서 빛나는 자연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재료비가 100배 가까이 차이 나는 두 작품이 판매 가격은 똑같다는 점도 흥미롭다.
한밤중 창으로 스며들어 벽에 비친 달빛을 표현한 ‘뾰족한 달빛’, 작가가 개발한 새로운 검은색인 ‘이정배 블랙’을 사용한 조각 작품도 인상적이다. 금·은 등 금속과 물감, 나무 등 다양한 재료의 물질적인 특징을 섬세하게 이용해 만든 작품들인 만큼 실제로 봐야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내년 2월 1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