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563채 샀다가 덜미
26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강력범죄수사대는 지난 21일 빌라왕 신모씨(38)와 공범인 공인중개사 김모씨(39)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신씨는 2020년 9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인천과 서울·경기 등에서 구축 빌라, 오피스텔 등 563채를 무자본으로 매입하고 전세보증금 1151억원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피해 사례가 가장 많은 지역은 그동안 전세사기가 빈발한 인천 미추홀구였다.경찰은 또 전세사기 과정에서 빌라 매도인과 세입자를 모집하고 건당 300만~1000만원을 챙긴 부동산 컨설팅 업자, 공인중개사 등 27명도 불구속 입건했다.
신씨는 3년 전만 해도 김씨의 공인중개사무소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원이었다. 다중 채무에 시달리던 그는 김씨로부터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금반환보증보험과 금융권 전세자금 대출을 이용해 빌라를 산 뒤 되팔 수 있는 전세사기 수법을 소개받았다.
신씨의 수법은 다른 빌라왕들과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새로 지어진 빌라의 시세가 불명확한 점을 적극 활용한 기존 전세사기범들과 달리 구축 빌라와 오피스텔로 세입자를 모은 것이다. 사기 수법이 조금 더 복잡하지만 당시 사회 문제가 된 신축 빌라의 전세사기 의심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을 파고들었다.
신씨는 공범인 부동산 컨설팅 업자로부터 잘 팔리지 않는 시세 2억~2억3000만원 수준의 소규모 빌라를 소개받았다. 예를 들어 2억3000만원짜리 빌라를 컨설팅업자들이 빌라 주인에게 2억원에 사겠다고 제안했다. 동시에 다른 공인중개사는 세입자를 모집했다. 공인중개사는 집을 구하는 세입자에게 “이 빌라의 시세는 2억3000만원”이라며 “2억2000만원에 전세로 들어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세입자 입장에선 과거 거래 내역을 보면 2억3000만원에 거래되는 집이기 때문에 사기라고 의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금융권에서 매매가의 90%까지 전세자금을 빌려준다며 세입자를 설득했다.
빌라왕의 최후는 ‘무일푼’
세입자가 낸 전세보증금(2억2000만원)과 실제 매매가(2억원)의 차이인 2000만원을 신씨 일당이 나눠 가졌다. 공인중개사는 세입자 소개 비용으로 1000만원을, 부동산 컨설팅 업자에겐 300만~600만원을 사례비로 지급했다. 나머지는 신씨와 김씨가 나눴다. 신씨는 동시에 이 빌라의 소유권을 가졌다.신씨 일당은 세입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HUG의 전세금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할 것을 권했다. 경찰 관계자는 “세입자들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공인중개사의 설명에 의심 없이 계약했다”며 “전세사기를 벌여도 정부가 보상해준다는 제도의 맹점을 악용했다”고 지적했다.
경찰은 신씨가 빌라 가격이 오르면 이를 되팔아 차익을 올릴 목적이었다고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빌라 가격이 하락하고 전세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덜미를 잡혔다. 국토교통부는 작년 전세사기 실태 조사를 벌이던 중 신씨의 범행을 발견해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신씨는 빌라 등을 563채 소유한 자산가였지만 수중에 현금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사는 집 역시 보증금 2000만원, 월세 50만원의 아파트였다. 개인 채무가 많은 상태였고 세금 체납액도 13억5000만원에 달했다. 신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행위 자체를 인정하지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목적은 아니었다”고 했다.
조철오 기자 che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