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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결혼할래 죽을래"…'스토커 그녀' 저지른 일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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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분명 사랑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랬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요.

그녀와 남자는 한때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느새 그녀의 사랑은 집착으로 변했습니다. 그녀는 남자의 친구들에게 접근해 환심을 산 뒤 이를 이용해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 보듯 환히 들여다봤습니다. 남자가 다른 도시로 도망가면 그녀는 곧바로 뒤를 따랐고, “따라오지 말라, 네가 싫다”고 하자 남자의 숙소가 있는 곳의 옆 마을에 묵으며 “보고 싶다, 결혼하자”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주변에는 “남자가 나를 이용하고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남자는 애써 그녀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남자의 호텔방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녀의 친구였습니다. 불쾌함도 잠시. “그녀가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어요. 상태가 안 좋아요. 당신이 보러 가야 해요.”

아무리 스토커라도 한때 사랑했던 사이. 남자는 한달음에 그녀 곁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멀쩡했습니다. 총을 든 채 그녀는 말했습니다. “나랑 결혼해. 안 그러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애원, 설득, 분노, 말다툼….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갑자기 울려 퍼진 총성. 곧이어 남자는 자기 왼손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본 그는 총에 맞아 박살 난 왼손 중지를 보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이 불운한 남자의 이름은 에드바르 뭉크(1863~1944). 누구나 한 번쯤 봤을 ‘절규’를 그린 노르웨이의 국민 화가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그의 삶에 닥친 수많은 불행 중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뭉크는 이처럼 자기 삶에 닥친 수많은 고통을 그림에 녹였고, 자신의 그림을 ‘영혼의 일기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일기장을 함께 들여다 보겠습니다.
죽음, 죽음, 죽음


1863년 노르웨이 오슬로의 서민 동네, 초라한 침실에 놓인 좁고 낡은 나무 침대에서 뭉크는 태어났습니다. 결핵에 걸린 어머니는 뭉크를 낳으면서도 계속 기침을 했습니다. 뭉크 역시 어머니를 닮아 허약했습니다. 아버지는 급히 신부를 불렀습니다. 뭉크가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아서,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서둘러 세례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다행히도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뭉크는 살아남았고, 몸은 약하지만 똑똑한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예술에 대한 재능도 출중해서 7살 때 바닥에 그린 낙서로 가족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가난이었습니다. 뭉크의 아버지는 의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당시 노르웨이에서 의사는 하층민에 가까운 직업이었습니다. 늘 병에 걸렸거나 다친 사람을 봐야 해서 감염 위험이 높은 데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환자를 치료할 수단이 별로 없어서 자주 돌팔이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열악한 생활 환경은 어머니의 결핵을 더욱 빠르게 악화시켰습니다.


당시 집안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해가 질 무렵이면 어린 뭉크는 대문 앞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저기 오는 사람이 아버지가 아닐까’ 기대하면서요. 하지만 아버지는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내린 거리 위, 하나같이 지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올려다보면서 뭉크는 왠지 모를 우울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가 왔을 때, 뭉크는 더욱 깊은 우울감을 느꼈습니다. 그날 본 얼굴 중 아버지의 얼굴빛이 가장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피를 토하며 숨을 헐떡이는 아내와 다섯 명의 아이에게 돌아가는 가난한 가장. 그 모습은 어린 뭉크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뭉크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이상해졌습니다. ‘아내가 죽은 건 내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 아버지는 종교에 광신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조금만 잘못을 저지르면 “천국에 계신 어머니가 실망하고 계신다”며 호되게 때렸습니다.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지만, 명백한 학대였습니다.



뭉크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아버지는 평소 재미있게 놀아주셨다. 하지만 그런 만큼 아버지가 때릴 때는 더욱 아프고 끔찍했다. 아버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었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나는 광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 공포, 슬픔, 그리고 죽음의 천사는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내 옆에 서 있었다.

가난하고 우울했던 어린 시절, 뭉크의 유일한 버팀목은 한 살 터울의 누나였습니다. 그는 누나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누나를 어머니처럼 따르고 사랑했습니다. 누나도 뭉크를 아껴 줬습니다. 하지만 누나마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폐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죽음은 뭉크의 영혼에 또 한 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습니다. 한편 뭉크의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커져만 갔습니다. 아버지는 의사였습니다. 기도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의술과 기도는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4살이 된 뭉크는 여전히 허약했지만 총명했습니다. 그는 공업 학교에 입학해서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특히 물리학과 수학 성적이 좋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화가가 되고 싶으니 공업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당시 노르웨이 경제 상황은 매우 나빴지만, 그나마 기술이 있으면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뭉크는 장남이었고 세 명의 동생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기술을 배워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술이라니요.

뭉크 자신조차 화가가 되기로 한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 무렵 그의 일기장에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 줄 썼을 뿐입니다. 다행히도 그의 재능을 알아본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를 대신 설득했습니다. “뭉크의 재능이라면 화가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덕분에 뭉크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오슬로 미술공예학교에 진학했고, 금세 재능을 인정받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뭉크의 그림 실력이 느는 데 비례해 그의 술도 늘어만 갔습니다. 어머니와 누나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겹쳐 뭉크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이를 달래기 위해 뭉크는 허구한 날 사고뭉치 친구들과 어울려 아침부터 밤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그럴수록 아버지와의 갈등은 심해졌습니다.


뭉크의 그림에 대한 반응도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술계는 인상주의와 사실주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뭉크는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따라 변화하는 사물의 덧없는 표면에만 집착하고 있었고, 사실주의 화가들은 별 볼 일 없는 것들을 쓸데없이 자세히 그리고 있었습니다. 뭉크는 대신 자신의 영혼 깊이 새겨진 상처와 원초적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화풍은 사실주의자들과 인상주의자들의 협공을 받았습니다. “형편없는 미완성 작품. 실체가 없다.”“그림이 랍스터 소스를 묻힌 생선 같다.” 악평이 쏟아졌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덕분에 뭉크는 스물 여섯살 때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파리로 떠나는 배를 타기 전날, 온 가족은 식탁에 둘러앉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식사를 했습니다. 못마땅해하는 듯한 표정의 아버지 때문에 식사 분위기는 어두웠습니다. 정적 속에서 이따금 나이프와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아버지와 뭉크의 대화는 이게 전부였습니다. “파리는 날씨가 습하다니까 건강 조심해라.” “네.”


그리고 마침내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항구에 도착한 뭉크는 자신이 너무 일찍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직 배가 출발하려면 몇 시간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문득 아버지에게 제대로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애증의 관계라지만 키워주셔서 감사했다고,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시라는 말 정도는 하고 싶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놀란 눈을 했습니다. 곧이어 아버지의 얼굴에 빈정거리는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바뀌었나? 집에 남으려고?” 뭉크의 마음은 차게 식었습니다. “그럴 리가요.” 그리고 그는 다시 항구로 향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증기선은 마침내 굉음을 내뿜으며 항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승객들처럼 뭉크도 갑판 위에 서서, 마중 나온 몇 안 되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뭉크는 이상한 시선을 느꼈습니다. 항구 구석에 놓인 두 개의 기다란 화물 컨테이너 사이, 짙은 그늘 속에서 그는 구부정한 모습의 한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가난과 절망, 그리고 반전


사이가 좋지 않은 가족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애틋한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뭉크와 아버지의 사이도 어쩌면 좋아질 수 있었을 겁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지만 않았더라면요. 유학을 떠난 그해, 파리에서 자리를 잡으려 고군분투하던 뭉크는 집에서 날아온 편지를 받고 또 한 번 슬픔에 빠집니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 됐습니다. 당장 남동생의 등록금부터 해결해야 했습니다.

급하게 돈을 빌려 집에 부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황은 암울했습니다. 뭉크의 그림은 여전히 인정받지 못했고, 몸은 매일같이 아팠고, 알코올 중독도 여전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뭉크는 언제나 배고픔과 외로움과 추위에 시달렸습니다. 숙소 침대 커버에 물감을 흘렸지만 물어낼 돈이 없어서, 그 위에 물감으로 원래 커버 무늬를 덧그린 뒤 도망치듯 숙소를 옮긴 적도 있었습니다. 절규를 그리기 전 완성한 유사한 작품 ‘절망’(1892)이 이때 무렵 그린 작품입니다. 길 한가운데서 인파의 흐름을 거스르며 등을 돌린 채 걷고 있는 인물이 바로 뭉크입니다.


유일한 희망은 남동생이 대학을 졸업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지만, 몇 년 뒤 그마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여동생 중 한 명도 정신병으로 입원했습니다. 이런 불행은 다시 한번 뭉크에게 불안과 우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자살 충동이 찾아왔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뭉크는 붓만큼은 놓지 않았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끈기 덕분일 겁니다. 반전의 계기는 1892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뭉크의 개인전. 베를린 언론들은 처음 보는 우울하고 기괴한 화풍의 그림에 맹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저런 전시는 당장 중지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불과 개막 1주일 만에 전시는 강제로 중단됐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의 명성을 쏘아 올리는 방아쇠 역할을 했습니다. 뭉크에 대한 동정론이 일었고, 그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본 젊은 베를린 예술가들 사이에서 뭉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겁니다. 이 해프닝을 계기로 독일에서 뭉크의 평가는 계속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뭉크는 독일 현대미술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세 명의 여인


뭉크에게는 세 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학생 시절 만난 밀리 탈로. 여름을 맞아 가족과 함께 떠난 휴가지에서 뭉크는 탈로를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뭉크는 그녀가 입고 있는 얇고 연한 파란색 여름 정장에, 바람에 물결치듯 우아하게 날리는 치마에, 우아하고 기품있는 그녀의 태도에 끌렸습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탈로는 ‘팜므 파탈’이었습니다. 그녀는 유부녀였지만 여러 남자를 유혹하고 다녔습니다. 뭉크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불륜을 저지른 뭉크는 죄책감에 빠졌습니다. “나는 우리의 사랑이 잿더미로 변해 바닥에 깔리는 걸 느꼈다.” 탈로는 뭉크를 조금 가지고 놀다 버리고는 다른 남자를 찾아갔습니다. 성(性)과 우울, 후회, 두려움을 연관시키는 뭉크 특유의 정서가 이때 확립됐습니다.


두 번째 사랑은 어릴 적 알고 지내다 베를린에서 다시 만난 다그니 유엘. 그녀는 주변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을 지닌 여성이었습니다. 뭉크와 잠시 사귀다가 헤어졌지만, 그 후에도 둘의 사이는 좋았습니다. 유엘이 뭉크의 친구인 폴란드 출신 작가와 만나 결혼한 뒤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뭉크와 유엘은 종종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응원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엘의 남편은 매일 술을 마시고 바람을 피워대는 형편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결혼 생활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급기야 유엘이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증거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남편이 내연녀와 결혼하기 위해 유엘을 죽였다”고 수군댔습니다. 뭉크의 영혼에 또 하나의 상처가 새겨졌습니다.


마지막 여성이 첫 부분에 나온 툴리아 라르센입니다. 셋 중에서도 툴리아는 최악이었습니다. 그녀는 뭉크에게 무섭게 집착하며 따라다녔습니다. 결혼하자며 자살 소동까지 일으켰지만, 그 과정에서 사고로 인해 뭉크의 왼손 중지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뭉크는 남은 평생 손의 고통에 시달렸고, 이를 잊기 위해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왼손을 장갑 속에 꼭꼭 숨기고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꺼내지 않았습니다. 뭉크가 죽은 후 그의 집에서는 40켤레에 달하는 장갑이 발견됐습니다.
죽음과 함께한 삶
뭉크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별개로, 그는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불행이란 불행은 다 겪으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던 끈기가 모두에게 인정받은 겁니다. 40대에 접어든 뭉크는 1903년부터 1907년까지 5년 동안 유럽에서 전시를 43번이나 열었습니다. 돈도 모였습니다. 특히 유럽의 부자들이 앞다퉈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기 시작했습니다. 뭉크는 아이들의 그림을 특히 잘 그렸습니다.


인간적으로도 뭉크는 훌쩍 성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뭉크는 자신의 그림을 ‘내 아이들’이라고 부르며 판매를 꺼렸습니다. 자신의 기억과 영혼이 담겨 있는 작품들이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남은 진짜 가족, 두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이 ‘아이들’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뭉크가 비슷한 주제를 여러 번 자주 그렸던 것도 작품을 떠나보내는 아쉬움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절규’만 해도 4개의 버전이 있으니까요.

말년의 뭉크는 노르웨이에서 독신으로 반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여전히 그에게는 여러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자이자 유명 인사가 된 그에게 사람들은 끊임없이 돈을 구걸했습니다. 마당에서 기르는 개를 누군가 총으로 쏴 죽인 일도 있었고, 철없는 젊은이들이 밤낮없이 그를 찾아와 만나달라고 하고 전화를 거는 등 괴로운 일이 많았습니다. 그에게 아무것도 해준 적 없는 노르웨이는 세무서를 통해 끊임없이 돈을 뜯어 갔습니다. 시력은 약해졌습니다. 자신을 가장 먼저 알아봐 줬던 독일에서 자기 작품이 ‘퇴폐 미술’로 낙인찍히는 일도 겪어야 했습니다. 나치의 짓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온을 유지했습니다. 뭉크는 그저 묵묵히 혼자 그림을 그렸습니다. 돈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관심 있는 건 단 하나, ‘영혼의 일기장’이자 ‘자식’인 그림을 이 세상에 남기는 것뿐이었습니다. 가구가 거의 없는 그의 저택에는 수백장에 달하는 그림이 쌓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그가 81세까지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내면의 평온 덕분이었을 겁니다.


마침내 다가온 죽음까지도 그는 당당하게 맞이했습니다. 죽기 얼마 전, 그는 가정부에게 “죽을 때 혼자 있게 해달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인생의 봄이었을 때 이미 죽음을 경험했어. 죽음은 진정한 탄생이네. 썩어가는 내 시체에서 꽃이 자라고, 그 꽃 속에서 나는 계속 살아가겠지. 죽음은 삶의 시작이야.” 1944년, 그렇게 그는 홀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뭉크의 삶은 실패와 절망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습니다. 하지만 뭉크는 결코 삶을, 그림을 놓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면서도, 자신의 깊은 내면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 이미지들을 건져 올려 화폭에 표현했습니다. 언제나 그의 삶에는 죽음이 함께 했고 마침내 그 자신도 죽음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결코 그 앞에서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의 일기장’은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일종의 승리의 기록으로 미술사에 영원히 남았습니다.



<i>*이번 기사는 'Edvard Munch: Behind the Scream' (Sue Prideaux 지음)을 중심으로 'Munch'(울리히 비쇼프 지음, 반이정 옮김, 마로니에북스-타셴), 'The masterworks of Edvard Munch'(뉴욕 MoMA 전시도록)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은 출간 준비를 위해 다음주(23일) 한 주 쉽니다. 2주 뒤 더욱 좋은 글과 그림으로 찾아뵙겠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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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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