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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역사를 만나는 곳, 공평동 센트로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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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흰 두루마기에 흰 갓을 쓴 흰 얼굴의 선비가 보였다. 나른한 오후 시간, 헛것이 보이나. 깜짝 놀라 엘리베이터 문을 황급히 닫았다가 호기심에 열림 버튼을 누르고 다시 선비를 쳐다봤다. 살아있는 선비가 아니었다. 마음을 다잡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투명 유리로 된 바닥을 조심스레 한 발짝 한 발짝 디뎠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어두운 조명 아래 약간은 음습한 기운의 돌무더기 유적들이 발밑에 들어왔다. 반면 너무나 투명한 유리 관람 데크 아래 옛 건물터와 골목길이 입체적으로 펼쳐지면서 금세라도 바닥에 미끄러져 그 속으로 빠질 것 같았다.

서울 종각역 인근, 현대적 세련미를 자랑하는 거대한 센트로폴리스 오피스 빌딩 지하 1층에는 놀랍게도 600여 년 전 유적이 속살을 드러낸 채 숨 쉬고 있었다. 새 직장 법무법인 태평양이 자리 잡은 센트로폴리스 빌딩에서 근무한 지 1년 반. 바쁜 일상에 허덕이다보니 뉴스로만 접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이제서야 두 발로 걸어보았다.

센트로폴리스 이전, 이곳 공평빌딩을 몇 번 찾았던 기억이 있다. 유난히 한국화 전시회가 자주 열린 공평아트센터가 있던 곳. 알고 보니 조선시대 한양, 일제 강점기 경성의 역사까지도 켜켜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여러 국내외 기업의 오피스가 들어서 수많은 유동인구를 품고 있는 센트로폴리스 주변이 조선시대에도 한양 최고 번화가(행정구역: 한양 중부 견평방)이자 쌀, 비단, 우산, 사기그릇, 건어물, 종이, 초립 등이 팔리던 시전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유적전시관에선 조선시대 골목길, 옛 기와집 구조를 추정할 수 있는 가옥터 등 견평방(堅平坊)의 다양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공평동 유적에서 함께 출토된 생활 도자기 파편들도 흥미로웠다.

특히 공평동(公平洞)이라는 이름은 사법기관인 의금부(공평동 SC제일은행 자리)에서 재판할 때 일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됐다고 하니, 법무법인 태평양이 공평동에 자리한 것도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듯하다.

감탄스러운 점은 ‘문화재 전면 보존, 대신 용적률 상향 인센티브’라는 상생협력의 룰을 통해 서울시와 사업시행자가 이 금싸라기 땅에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멋들어지게 실현했다는 것이다.

공평동에 이어 인근 인사동 일대엔 더 큰 규모의 유적전시관이 몇 년 후 들어선다고 한다. 훈민정음 창제 시기의 금속활자를 비롯해 물시계, 천문시계 등 국보급 유물이 다수 발견됐기 때문이다.

공평동, 인사동이 내뿜는 독특한 서울의 기운을 느끼며 다시 투명 유리 관람데크 위를 걸어보았다. 아, 더 이상 미끄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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