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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헌법은 전쟁을 등에 업고 세계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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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根源)에 전쟁이 있었다. 현대 국가라면 무릇 갖춰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헌법, 그중에서도 성문헌법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마주하게 된다.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강화했다”는 역사사회학자 찰스 틸리의 유명한 명제는 성문헌법의 출현에도 큰 이질감 없이 적용된다.

<총, 선, 펜>은 저명 역사학자인 린다 콜리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성문헌법 출현의 역사를 되짚어본 책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처럼 세계 헌법 역사와 관련해 큰 역할을 한 국가는 물론 18세기 이후 러시아, 아이티, 노르웨이, 튀니지, 베네수엘라, 인도, 하와이, 일본 등 다양한 나라의 헌법 제정사를 거침없이 다룬다.

헌법을 잉태하고 세상에 선보이는 자양분 역할을 한 것은 ‘총’으로 비유된 전쟁과 혁명 같은 폭력이었다.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고, 육군과 해군을 아우르며,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공간으로 확장된 ‘하이브리드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유럽 제국들은 서둘러 성문헌법을 정비했다. 전에 없이 전쟁 규모가 커져 군비 부담과 징병 수요가 급증한 데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대신 높은 세금과 징병을 수락한 대가로 남성은 선거권과 같은 권리를 확대해 나갔다.

성문헌법의 산모가 전쟁(총)이었다면 이를 전 세계로 확산하는 촉매 역할을 한 것은 ‘배’였다. 전 지구적 차원의 전쟁을 가능하게 한 대양해군 전함은 총탄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혁명정신, 헌법에 대한 자각도 전파했다. 잇따라 성문헌법을 만든 프랑스와 미국의 움직임에 자극받은 유럽 변방과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 혹은 ‘정치체’들은 서둘러 저마다의 성문헌법을 갖췄다.

그리고 때마침 활성화한 출판인쇄술(펜)에 힘입어 성문헌법은 각 국가에 빠른 속도로 도입돼 깊숙하게 뿌리내렸다. 미국의 ‘식민지 헌장’ ‘독립선언서’ 등은 신문 한 면에 인쇄돼 손쉽게 큰 소리로 낭송되며 청중에게 전파됐다. 팸플릿과 신문 등 인쇄물의 영향력에 감명받은 각국 헌법 제정자들은 자신이 발표한 텍스트를 전파할 인쇄를 중시했다. 이후 세계 각국 주요 헌법에는 인쇄의 자유가 국민주권, 종교의 자유, 무역의 자유, 청원의 자유보다 더 자주 주요 권리로 다뤄졌다.

책은 군주제 쇠퇴와 공화주의의 부상, 국민국가 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의 결과물이라는 성문헌법 등장에 대한 통념을 상세한 ‘케이스 스터디’를 앞세워 토대부터 허물어 버린다. 단선론적·발전론적 역사관을 대체한 것은 폭력과 우연의 혼합사다. 불규칙하며 도덕적이지 않은 ‘출생의 비밀’이 보기에 아름답지 않을 수 있지만 대신 역사의 다양한 모습을 더욱 솔직하고 충실히 담았다.

토머스 페인과 나폴레옹, 예카테리나 2세부터 투생 루베르튀르, 람모한 로이, 시몬 볼리바르, 이토 히로부미까지 다양한 지역의 역사와 인물이 정신없이 등장하는 탓에 배경지식을 충실히 갖추지 못한 독자가 읽기엔 쉽지 않다. <황조통지(皇朝通志)>라는 책을 <우리 8월 왕조에 대한 포괄적 논고>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소개하거나 수다한 고유명사를 외래어표기법에 어긋나게 표기한 번역도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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