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화폐는 금, 은과 같은 귀금속과 달리 소재 자체의 가치가 매우 낮다. 하지만 우리는 중앙은행이 액면지급을 보장하고 발행하는 화폐의 가치를 기본적으로 신뢰하고 수용하며 화폐를 매개로 교환과 경제활동의 촉진, 재화·서비스 생산의 전문화와 생산성 향상, 사회 후생 증진과 같은 편익을 누릴 수 있다. 화폐제도는 유발 하라리가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류 번영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언급한 사회 구성원 간 믿음에 바탕을 두고 조직화된 약속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화폐의 역사는 위조범과의 투쟁의 역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화폐를 위조하는 행위가 있었다. 최초 기록된 화폐 위조 사건은 초콜릿 재료인 카카오 콩을 화폐로 사용한 멕시코 고원의 아즈텍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카오 콩의 높은 교환가치에도 불구하고 콩 생산에 한계가 있다 보니 진흙을 섬세하게 빚은 가짜 콩을 카카오 콩에 섞어서 화폐로 유통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이 미국의 달러 가치 체계를 흔들기 위해 위조지폐를 유통하는 전략을 사용했다든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파운드화를 위조해 영국 상공에서 대량 유포할 계획을 세웠다는 일화도 있다. 이처럼 전쟁 등 특수한 상황에서 상대의 화폐 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중요한 전략으로 여겼을 정도로 화폐가 한 사회의 온전한 유지를 위한 근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닌데 최근의 가장 대표적인 화폐 위조 사례는 5000원권 ‘77246 사건’을 들 수 있다. 컬러프린터와 컴퓨터를 이용해 77246을 제외한 나머지 일련번호를 일일이 수정하는 등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위조 방법을 동원한 범인은 CCTV가 없는 슈퍼마켓에서 소액결제 후 거스름돈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위조지폐 번호 77246을 계산대에 기록한 뒤 동일한 번호가 있는 지폐를 받고 경찰에 신고한 슈퍼마켓 주인의 기지로 꼬리가 잡혀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현재 우리나라 지폐는 최고 수준의 첨단기술이 여러 단계에 걸쳐 적용돼 완벽하게 모방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와 동시에 디지털 기기 확산으로 위조지폐를 손쉽게 만들 수 있겠다는 잘못된 유혹에 빠지기 쉬운 여건이기도 하다. 다행히 한국은 유통지폐 100만 장당 위조지폐 발견 건수가 2022년 기준 0.02장으로 다른 국가에 비해 매우 낮다. 다만 코로나19 사태 진정 이후 대면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위폐 유통 건수가 다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경각심을 내려놓기엔 이르다. ‘77246 사건’과 같이 위조화폐 근절을 위해서는 화폐를 실제로 사용하는 국민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위조가 의심되는 지폐를 수령한 경우에는 반드시 경찰에 신고해야 하며, 의심스러운 지폐를 건네준 사람의 인상착의를 메모하고 타고 온 차종과 번호판을 적어두면 수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은행을 비롯한 유관기관과 국민이 힘을 합쳐 우리나라가 쌓아온 ‘위조지폐로부터 안전한 국가’라는 자랑스러운 위상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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