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옆구리에 핸드마이크를 달고 시민들을 몰고 다니며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해설하는 무리를 만나게 된다. 특히 서촌에 가면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풍경 너머로 문학 향기에 흠뻑 젖은 사람들의 상기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서촌에서 가장 핫한 장소가 어디일까? 윤동주의 하숙집 터?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걸음을 멈춘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잠시 학창 시절 외운 <서시 序詩>를 떠올려 보기도 한다. 그런데 윤동주는 서촌에서 3개월 밖에 살지 않았다. 서울에서 윤동주의 흔적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은 현재 연세대 신촌 캠퍼스의 핀슨관이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학한 그는 이 건물에서 이양하, 김송 교수 등에게 수업을 받았다. 그가 거처한 곳은 학교 기숙사였지만 일제강점기 말기로 접어들면서 여러 곳을 다니며 하숙했다. 그런데 그중 한 곳이 이곳 중림동 일대, 성문 밖 첫 동네였다면 믿으시겠는가?
윤동주의 사촌, 송몽규 선생의 먼 친척인 송우혜 선생님이 쓴 <윤동주 평전(송우혜 저, 서정시학, 2014년, 241페이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윤동주의 연희전문 입학 동기인 유영 교수의 증언이다. 송우혜 선생님의 양해를 구하며 책의 일부를 소개한다. 유영 교수는 ‘동주는 먼저 아현동에서 하숙을 했었지요. 후에 서소문으로 이사했어요. 서소문 하숙집은 옛날 서대문구청 자리 근처였는데 그때만 해도 거긴 꼭 시골과 같은 곳이었어요. 앞에 조그만 개울이 흐르고 있고, 근처에는 우물도 있었어요. 바로 동주의 시<자화상>의 배경이 된 우물이지요. (앞의 책 241페이지)
나는 송우혜 선생의 책을 읽으며 숨이 멎을 뻔했다. 아니 윤동주가 이곳에 살았다고? 과거 서대문구청 자리였다고? 여러 자료를 검색해 보니 서대문구청은 지금의 상수도사업본부 자리에 있었다. 당시에는 경성부 산하인 서대문구청이 해방 이후 이전하면서 같은 서울의 산하기관인 상수도사업본부로 바뀐 것이다.
유영 교수의 발언이 정확하다면 윤동주의 시<자화상>의 배경이 고향 명동촌의 ’수십 길 깊이의 우물‘이 아니란 말인가? 자화상을 쓴 시기가 1939년 9월, 윤동주가 이곳에서 하숙을 한 시기와 겹친다. 그렇다면 윤동주가 살았던 집 앞의 개울은 만초천이거나 만초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천일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근처에 우물이 있었다는 유영 교수의 말이다. 윤동주의 문학에서 우물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용정, 윤동주의 고향 집에는 우물을 재현해 놓았고, 서촌의 윤동주문학관에는 윤동주의 우물에서 영감을 받아 컴컴한 우물을 형상화한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살았을 때 우물이 있었다면…서소문역사공원에 가면 뚜께 우물이 있다. 윤동주는 이곳에 살면서 길 하나 건너 뚜께 우물로 물을 길러 갔을지도 모르겠다. 뚜께 우물은 1912년 총독부가 만든 지적도를 찾아보면 현재 중앙일보사 방향의 서소문 역사공원 상부 오른쪽 경의선 철로로 인접한 자투리공원 부지에 있었다고 한다. 이 우물이 혹시? 나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서울 상수도사업본부와 뚜께 우물은 지금도 길 하나 건너로 지척이다.
윤동주는 왜 이곳에서 하숙했을까? 이유는 철길에 있다. 경의선 철도, 지금의 중앙 경의선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서소문 역이 있었다. 지금의 오진빌딩 바로 위 편에 존재했다.
서소문역은 경성역에서 출발하는 경의선 열차가 처음 정차하는 역이다. 다음이 아현리역일 것이고 그 다음쯤이 신촌역이다. 신촌역은 70, 80세대 대학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을 느낄 수 있는 역이다.
내가 청년 시절에는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백마역에서 내려 ’화사랑‘ 같은 카페에 다녀오기도 했고, 서울 인근으로 엠티를 가는 신촌 지역 대학생들의 명소였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다닐 때는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의 통학 역이었다. 서소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촌역으로 통학하는 윤동주. 아마도 손에는 가방을 들었을 테고 옷은 이수일이 입었던 망토가 달린 교복이었을 테지만 멋부리지 않아도 얼굴엔 강도 높은 순수성에서 뿜어내는 우수가 짙게 배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곳이 관광명소라도 된 듯하다.
그는 우물에 비친 우수에 찬 얼굴을 보고 자화상이라는 시를 썼다. 물론 시인은 한 가지 이미지만 가지고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에 있는 유년 시절의 우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화상의 배경이 된 우물이 이곳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시할 근거도 없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는 오래된 건물들이 많다. 자주 가는 식당에 들어서면서 혹시 이곳이 윤동주의 하숙집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곳을 윤동주의 흔적으로 덧입혀 볼 수도 있겠다.
이곳 상수도사업본부의 우물 모양의 사각형 구조물 앞에서, 서소문 뚜께 우물터 앞에서, 윤동주의 자화상을 읊어보자. 시상이 떠오른 윤동주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 성문 밖 첫 동네는 낭만이 흐르는 곳이다. 윤동주의 자화상을 읽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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