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의 대표적 ‘씽크탱크’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국민연금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국책연구원 내 대표적인 전(前)정부 ‘알박기’ 인사로 꼽히는 이태수 보사연 원장의 기금위원 재위촉이 3개월째 미뤄지면서다. 300여개 국내 상장사의 대주주인 국민연금을 움직이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금위 내 주도권을 둘러싼 알력 다툼이 펼쳐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금위원 임명 이례적 지연26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복지부는 지난 5월 기금운용위원 임기가 끝난 이 원장의 재위촉을 보류하고 자본시장연구원, 한국금융연구원 등 연구기관에 인사 추천을 요청했다. 그간 두 차례의 기금운용위원회가 열렸지만 복지부는 이 원장의 기금위원 임기 연장에 나서지 않았다. 복지부가 실질적인 부처 씽크탱크인 보사연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으로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기금운용위원회는 4월말 기준 975조원에 달하는 적립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의 최고의사결정기구다. 복지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정부 측 위원은 총 6명이다. 사용자 대표는 3명이고, 근로자 대표 3명, 지역가입자 대표 6명, 그리고 관계 전문가 2명이 기금위원으로 활동한다.
이 가운데 2명의 관계 전문가 몫은 현재의 기금운용체계가 정책된 1999년 이래 보사연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줄곧 맡아왔다. 두 기관은 19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의 설계부터 1998년과 2007년에 두 차례에 걸친 연금개혁을 주도해왔다. 소속 자체는 국책연구원을 총괄하는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속이지만 실질적으론 각각 복지부와 기획재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씽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간 기금위원 자리가 공석으로 비워진 적은 종종 있었지만 ‘이번엔 다르다’는 것이 국민연금 안팎의 시각이다. 기금운용위원의 임기는 2년으로 1회 연장이 가능하다. 보사연이나 KDI 원장이 공석인 경우 임명이 미뤄지곤 했다. 하지만 이 원장의 보사연 원장 임기는 내년 5월까지로 1년 가까이 남아있다.
○참여연대 출신 원장 알박기에...정부 '경고 메시지' 내홍의 이면엔 국책연구원 내 대표적인 문재인 정부 알박기 인사로 꼽히는 이 원장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 국민연금 안팎의 시각이다. 이 원장은 1999년부터 2016년까지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문재인 정부 인수위원회에도 참여했던 대표적인 진보계열 사회복지학자다.
지난해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알박기 논란이 불거지면서 상당수 국책연구원장들이 스스로 물러났지만 이 원장은 ‘버티기’ 모드에 들어간 상태다. 문재인 정부에서 경제수석과 일자리수석을 각각 지낸 홍장표 KDI 원장과 황덕순 노동연구원장은 작년 7월 자진 사퇴했다. 전 정부 부동산 정책을 설계한 핵심 인사였던 강현수 국토연구원장 역시 지난 4월 임기를 1년반 남기고 사임했다.
보사연을 대신할 기관으론 금융위원회 유관 기관이지만 반관반민 연구소의 성격을 가진 자본시장연구원과 한국금융연구원이 거론된다. 복지부는 그간 관계 전문가 몫 기금위원을 선임할 때마다 이들 기관을 대상으로도 위원 추천을 받아왔지만 의례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국민연금의 주도권을 둘러싼 복지부와 기재부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는 상황에서 관계 전문가 몫 역시 양 부처가 양분하는 구조가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한 기금위 관계자는 “복지부가 주도하는 기금위에서 오랜 기간 보사연 원장은 장관 공석시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을 정도로 역할이 컸다”며 “복지부가 원래는 ‘자기식구’라 할 수 있는 보사연을 배제시키고 나선 것은 전에 없던 일”이라고 말했다.
○'막강 권한' 기금위 둘러싼 정치 싸움이처럼 정부가 국민연금 기금위 구성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은 기금위원이 가진 막강한 권한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10월 정부는 기금운용위의 권한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전체 기금위원의 3분의1 이상인 7명 이상의 동의를 받을 경우 의원에게도 독자적으로 안건을 발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전까진 위원장인 복지부 장관의 동의가 있어야만 안건화가 가능했지만 이젠 6명만 뜻을 같이 하면 주주활동 등 모든 안건 제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를 두고 기업들 사이에선 진보 시민단체와 노동계가 기업을 압박하는 ‘통로’로 악용될 것이란 지적이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경영계와 노동계가 각각 3명의 위원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6명의 기타가입자단체 추천 위원과 2명의 관계 전문가 위원의 절반인 4명만 확보하면 국내 상장사 300여곳의 대주주인 국민연금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 1월 참여연대가 기습적으로 국민연금의 사외이사 선임 주주제안을 추진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기타가입자단체 추천 몫으로 기금위원으로 있던 참여연대는 노동계 및 국책연구원 소속 위원들을 모아 삼성물산, 포스코 등 7개 기업에 대해 사외이사를 추천하는 주주제안 안건을 발의했다. 대상 기업의 지배구조가 재벌 친화적이고 산업재해가 발생하는 등 ESG(환경·사회·지배구조)측면에서 부실하다는 것이 이들이 내건 근거다. 이들의 안건은 기금위 내에서 동의를 얻지 못해 최종 무산됐지만 해당 안건이 공개되며 기업들엔 ‘ESG 부실기업’이란 낙인이 찍혔다.
전문가들은 사실상 ‘정치판’으로 전락한 기금위를 비롯한 국민연금의 지배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 밖에 없다고 입은 모은다.
오랜 기간 기금위 등에 참여해온 한 대학 교수는 “2050년대면 고갈되는 국민연금이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수익성을 높이는 일인데 정작 기금위에선 끊임 없이 좌우간 정치 싸움만 벌어진다”며 “전문가 몫으로 참여하는 국책연 원장들도 정치색 짙은 인사들이 정권마다 ‘낙하산’으로 임명되다보니 정치판의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기금위는 정치색을 배제하고 수익률 제고와 투자 선진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제대로된 전문가들로 채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