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난해 세계 최대 명품 소비국이었다. 명품 구입에 1인당 325달러(모건스탠리 추산)를 써 미국 중국 등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올해 들어선 경기 급랭 등의 여파로 사정이 확 바뀌었다.
주요 백화점 명품 매출이 속속 감소세(전년 동기 대비)로 돌아서고 있다. ‘명품족’ 사이에서 옥석 가리기가 본격화하면서 브랜드별 희비도 엇갈리는 분위기다.
여전한 에르메스 인기
17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서울 강남에 하이엔드 명품 특화 점포를 운영하는 A백화점은 상반기 명품 분야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들어 매달 한 자릿수 매출 증가율을 가까스로 유지하던 B백화점도 지난 6월 0%대로 추락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코로나19 창궐을 계기로 2020~2022년 명품 시장이 폭발함에 따라 주요 백화점 명품 매출이 매년 30~40% 급증한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명품족은 소비 금액을 줄이되 꼭 사야 할 브랜드의 구입은 이어갔다. 한국경제신문의 ‘빅3’ 백화점 취재 결과 최고급 명품의 대명사로 굳어진 ‘에·루·샤’(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 중 에르메스가 가장 높은 매출 증가율(20%대)을 보였다.
에르메스가 시장 조정기에도 돋보이는 성장세를 나타낸 건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이미지를 굳건히 하는 데 성공한 덕분으로 풀이된다. 에르메스는 리셀(되팔기) 열풍으로 중고 거래 물량이 늘어나자 지난해 3월 재판매 금지 조항을 신설하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구매 이력이 일정 기준을 충족한 고객에게만 인기 제품을 파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를 통해 ‘연간 매출 증가율 20% 유지’라는 내부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
‘무서운 성장세’ 디올
‘에·루·샤·디(디올)’란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는 디올도 호성적을 올렸다. 30%대 매출 증가율로, 구찌까지 포함한 5대 주요 명품 가운데 실적이 가장 좋았다.디올은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회장의 후계자로 첫손에 꼽히는 첫째 딸 델핀 아르노가 이끄는 브랜드다. LVMH는 2월 델핀이 디올 최고경영자(CEO)가 된 이후 “샤넬에 필적하는 브랜드로 키우겠다”며 공격적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은 디올이 가장 공을 들이는 국가로 손꼽힌다. 2017년 9개였던 백화점 매장을 26개로 늘린 것을 비롯해 서울 성수동에 1500㎡ 규모의 초대형 플래그십을 열어 명품업계를 놀라게 했다. “극단적으로 여성스러운 디올 이미지가 국내 소비자에게 먹혀들었다”는 게 패션업계 분석이다.
성장 둔화 브랜드는
이에 반해 샤넬과 구찌는 상반기에 부진했던 브랜드로 거론된다. 2020~2022년 두 자릿수 매출 증가율을 유지한 샤넬은 그 폭이 6%로 뚝 떨어졌다. 구찌는 5대 명품 중 유일하게 감소(-8%)했다.샤넬은 ‘리셀 거래가 활성화하는 과정에서 이미지에 흠집이 난 것 아니냐’는 게 관련 업계의 대체적 분석이다. ‘부티크에서 사는 브랜드가 아니라 온라인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구입하는 브랜드’라는 인식이 생겼다는 얘기다. 명품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엔데믹 선언 후 샤넬 인기 품목 중 상당수가 중국에 먼저 풀리기 시작한 것도 한국에서의 약세와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구찌는 트렌드 변화 대응에 실패한 게 요인으로 거론된다.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2015년 1월부터 지난해까지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를 맡아 로고가 전면에 드러나는 디자인으로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최근 몇 년간 ‘미니멀 트렌드’가 확산하면서 실적이 저조했다.
이 같은 브랜드별 실적 흐름은 세계적으로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주요 럭셔리 브랜드의 지난 1분기 실적을 종합한 결과 디올을 앞세운 LVMH와 에르메스 매출이 각각 두 자릿수(11%, 22%) 불어났고 케링그룹은 구찌 부진의 영향으로 2%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미경/양지윤 기자 capit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