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홀이 시그니처예요.”
명문으로 손꼽히는 골프장들이 으레 하는 소리다. 이런 이야기는 골프장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의 표현으로 듣기 마련이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모든 홀이 시그니처 홀인 골프장이 정말로 있다. 인천 청라국제도시의 베어즈베스트 청라 GC다. 27홀짜리 베어즈베스트 청라GC는 ‘골프의 전설’ 잭 니클라우스가 설계한 세계 290개 골프장에서 최고의 홀들을 추려 그대로 옮겨놨다. 골프장의 이름부터가 ‘골든 베어(황금곰)’ 잭 니클라우스의 손길이 느껴진다.
레플리카(복제) 코스 브랜드 ‘베어즈 베스트’를 사용하는 골프장은 지구촌에서 딱 세 곳. 아시아에서는 베어즈베스트 청라가 유일하다. 베어즈베스트 청라에는 미국 뮤어필드GC, 스페인 몬테카스틸로 골프리조트 등 국제적 인지도를 자랑하는 골프장에서 가져온 시그니처홀들이 즐비하다. 최고의 홀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시그니처 홀을 뽑아야 한다면 어떤 홀일까. 유수종 베어즈베스트 경기팀장은 오스트랄아시아 코스 1번홀(파5)을 내밀었다. 태국 5대 코스 가운데 하나인 람차방CC의 6번홀을 따온 것으로 “도심형 골프장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홀”이라고 했다.
티잉구역에 서자 저 멀리서 핀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 옆으로 벙커들이 줄을 서서 도열해 있지만 페어웨이가 워낙 넓어 부담이 없다. 데이터업체 CNPS에 따르면 지난달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롯데오픈에서 이 홀의 평균 스코어는 4.85타. 대회 나흘간 버디 108개, 이글 1개가 쏟아졌다. ‘티샷은 호쾌하게, 그린 주변은 정교하게’라는 니클라우스의 코스 설계 철학이 떠올랐다. ‘3온, 2퍼트는 무난하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하는 찰나, 유 팀장이 말했다. “이래봬도 총장 500m, 레드티에서도 400m가 넘는 긴 홀이에요.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하면 낭패를 봅니다.”
○세계 290개 골프장에서 뽑은 27개 홀
2012년 문을 연 베어즈베스트 청라는 여러모로 한국에서 보기 드문 골프장이다. 일단 시원시원하다. 136만㎡에 27홀만 들어가 있으니 당연한 결과다. 바다를 메워 만든 땅이어서 페어웨이도 평평하다. 골퍼들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곳이다. 27홀 가운데 26홀의 티잉구역에서 핀이 보일 정도다. 홀은 오스트랄아시아·미국·유럽코스에 각각 9개씩 따왔다. 9홀짜리 3코스 모두 평균 길이가 3100m 이상이다. 한국여자오픈, 한국프로골프(KPGA) 신한동해오픈, KLPGA 투어 롯데오픈, 하나금융그룹챔피언십 등 쟁쟁한 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다.골프장은 니클라우스가 공들여 배치한 함정으로 도전의식을 자극한다. 고운 모래로 채워진 116개의 벙커가 미스샷이 나올 지점마다 귀신같이 자리잡고 있다. 그린은 투어 프로들도 “까탈스럽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다. 우선 작다. 보통 골프장의 그린 크기는 평균 800~900㎡인데 베어즈베스트 청라의 그린은 평균 600㎡ 정도다. 주변은 러프와 벙커를 배치해 적당히 굴려서 그린에 올리는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평탄해보이지만 잔잔하게 숨어 있는 라이들이 골탕먹이기 일쑤다.
이수정 베어즈베스트 마샬은 “그린스피드도 3.0(스팀프미터 기준) 안팎으로 빠른 편이어서 ‘내기 골프를 치기에 좋은 구장’이라는 평가가 많다”고 귀띔했다.
페어웨이에는 켄터키블루그래스와 다년생 라이그래스를 심었다. 생육기간이 다른 두 종을 섞은 덕분에 사계절 내내 푸르고 밀도 높은 페어웨이를 유지한다.
○‘황금곰’의 덫에 걸려 ‘혼쭐’
시그니처홀이 1번이라고 했을 때 내심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람차방CC는 지난 휴가에 다녀온 골프장이었다. 확실히 눈에 익었다. 양 옆으로 즐비한 벙커, 페어웨이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나무 한 그루까지 똑 닮은 홀이 떠올랐다. 물론 열대우림 한가운데 있던 홀이 양 옆이 탁 트인 코스에 저 멀리 고층빌딩이 보이는 풍경과 함께하니 완전히 다른 홀의 느낌이 났지만.마음놓고 드라이버를 휘두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호쾌하게 휘두른 드라이버는 벙커에 빠졌다. 욕심을 부려서 힘이 들어갔나보다. “벙커 턱이 2m가 넘으니 일단 레이업을 하는 게 좋다”는 유 팀장의 조언을 받아 8번 아이언으로 페어웨이에 올렸다.
페어웨이 한가운데 자리잡은 이팝나무는 공략지점인 동시에 홀의 난도를 높이는 핸디캡 역할을 톡톡히 한다. 다행히 5번 우드로 친 세 번째 샷이 나무를 피해 그린 앞 50m쯤에 멈췄다. 유 팀장에게 “페어웨이 한가운데 있는 나무를 없애달라는 민원은 없느냐”고 묻자 “하루에도 몇 번씩 공을 맞는 불쌍한 나무인데 그냥 좀 예뻐해주시라”는 너스레가 돌아왔다.
52도 웨지를 잡고 온그린을 노렸다. 하지만 핀 뒤편에 떨어진 공은 내리막 경사를 타고 또다시 벙커에 빠졌다. 56도 웨지로 겨우 온그린에 성공한 뒤 투 퍼트. 그나마 동반자들의 후한 인심 덕분에 더블보기로 막고 홀 아웃했다. 집으로 돌아와 람차방CC에서의 스코어카드를 찾아봤다. 3번의 라운드, 6번홀에서 죄다 더블보기 이상을 쳤다는 걸 확인하고 골프 앞에 다시 한번 겸허해졌다.
서울 도심에서 40~50분이면 올 수 있어 접근성이 좋다. 7분 간격으로 하루 120개 팀을 받는다. 비회원제 골프장으로, 성수기 기준 그린피는 주중 24만1000원, 주말 30만1000원으로 높은 편이다. 그래도 예약이 열리면 몇 분 만에 마감될 정도로 티를 잡기 어렵다.
청라=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