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 미술시장의 대세는 ‘비(非)백인 여성 작가’다. 지난해 베네치아비엔날레를 비롯한 글로벌 전시회와 경매장, 아트페어에서 가장 ‘잘나간 작가’ 중 태반이 이들이었다.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다. 오랜 세월 세계 미술계는 백인 남성의 세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갤러리스트와 컬렉터들은 새로운 스타를 갈망해왔고, 그 ‘목마름’이 이제야 백인 남성의 대척점에 있는 비백인 여성에 닿은 것이다. 실력이 아닌 다른 이유로 저평가된 이들이 시장의 주목을 받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 한국에서 전시를 열고 있는 베트남 출신인 프랑스 추상회화 작가 흐엉 도딘(78)과 중국 출신 시야오 왕(31)이 그런 케이스다. 두 작가 모두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아시아계 여성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도딘의 아시아 첫 개인전은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베트남에서 태어난 작가는 1953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터지자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민을 떠났다. 이후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50년 넘게 작품 활동을 해왔다. 2021년 기메 국립 아시아 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어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고, 2022년 베네치아 코레르 박물관에 이어 올해 광주비엔날레에도 초청돼 광주 무각사에 작품을 거는 등 보폭을 넓히고 있다.
도딘은 돌가루를 이용해 만든 물감을 아주 얇게 여러 번 발라 그림을 완성한다. 작품이 담고 있는 단순한 조형과 은은한 색채는 한국의 단색화를 닮았다. 결과물이나 방식뿐만 아니라 작업 철학도 유사점이 많다. 완성된 그림만큼이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다. 작가는 “붓을 들어 올려 움직이는 몸짓 하나하나가 작품의 일부”라며 “조수를 두지 않고 홀로 명상하듯 새벽 4시에 일어나 작업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도딘은 이번 방한에서 단색화 대표 화가인 박서보 화백(92)을 따로 만났다. 박 화백은 최근 SNS에 도딘과 만난 사진을 올리며 “도딘과 나는 말이 통하지 않지만 통역이 필요 없었다. 평생 비슷한 작업을 해와서일까, 아니면 우리 정도 나이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일까”라고 썼다. 전시는 오는 8월 19일까지 열린다.
서울 신사동 페로탕에서 국내 첫 전시를 열고 있는 시야오 왕은 요즘 세계 미술시장을 달구고 있는 젊은 작가 중 한 명이다. 중국 충칭 출신인 작가는 21세 때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형체가 없는 추상화지만 선의 흐름은 동양의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화가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네 살 때부터 중국 전통 산수화를 따라 그린 영향이다. 여백의 미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가는 “내 그림에서 빈 공간은 그 자체로 작품의 일부”라고 설명했다.
이번 개인전 제목은 ‘알롱제’. 발레 용어인 알롱제는 동작을 시작할 때나 끝날 때 팔을 길게 늘어뜨리는 것을 뜻한다. 무용수가 동작 전 ‘알롱제’에 집중하듯 작가도 그림을 그리기 전 극도의 집중 상태에 들어간다는 뜻을 담았다. 그의 작품에 여러 선이 춤추는 듯한 리듬감이 엿보이는 이유다.
전시는 8월 19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