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은 글로벌 외식 산업의 좋은 표본이다. 풍요로운 소스와 넓은 카테고리, 글로벌한 소비력까지 모여드는 나라다. 작년 12월, 건기에 접어든 완벽한 날씨에 태국을 찾았다. 그동안 태국에서 보낸 시간들이 가벼운 목적의 휴식과 식도락을 위한 여행이었다면, 이번에는 확실하게 태국의 지역별 식문화 마스터들에게 요리를 배우는 기회였다. 물론 문화적 성향과 특이점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덧붙여서.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올해 1위를 거머쥔, 태국을 대표하는 차세대 셰프 톤(Ton)의 레두(Le Du)부터 저렴하고 맛 좋은 길거리 음식들까지 훑었다. 수많은 태국의 레스토랑 중 자본과 브랜딩 등 논리적 접근만으로는 이해와 설명이 어려운 독보적 존재가 있다. 2019년 넷플릭스 ‘길 위의 셰프들’에도 소개된 쩨파이(Jay Fai)가 그 주인공이다. 태국 길거리 음식을 만드는 셰프로는 최초로 2018년 미쉐린가이드에 1스타로 등재됐다.
올해 77세가 된 쩨파이의 셰프 란 쩨파이(Raan Jay Fai)는 태국 미식의 아이콘이다. 현지의 요리사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셰프들의 셰프’. 태국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요리사 중 한 명일뿐 아니라 창의력과 끈기, 인내의 상징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쩨파이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오전 7시부터 줄을 서 번호표를 받아가는 사람들(잭 에프론, 박보검과 같은 유명 인사부터 마윈, 팀 쿡 등 비즈니스 거물에 이르기까지)로 그의 식당은 늘 붐빈다.
오후 2시 반 영업을 시작해 밤 12시가 다 될 무렵 웍의 불이 꺼지는 쩨파이는 더 이상 단순히 길거리 음식을 만드는 노점상의 요리사가 아니다. 방콕 역시 점차 현대화되는 도시의 길 위에서 많은 것이 변화되고 있고 노점상 역시 위생적, 정책적인 지도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이런 전통과 현대의 요소들이 충돌하는 격동기를 직진으로 돌파한 셰프 쩨파이. 그의 요리 안엔 인생에서 맞이한 수많은 위기와 담대한 결정, 그리고 도전이 녹아 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재봉사로 10년
빈민가에서 시작된 그의 인생 안에는 시장에서 닭고기 국숫집을 하던 어머니, 아편 중독인 아버지가 있었다. 가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찌감치 재봉사가 된 쩨파이는 10년간 원단과 실, 재봉틀을 만지며 재봉사로 일했다. 조금씩 돈이 모이기 시작할 무렵, 예상치 못한 폭발사고로 재봉사로 일하던 공간이 불에 타 없어지고 새로운 절망의 바닥을 경험하게 됐다. 입고 있던 잠옷 외엔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20대의 현실은 얼마나 잔혹한가.
결국 어머니가 하시던 닭고기 국수 식당을 도우며 주방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한참 어색한 기술에 모두가 잠든 밤, 작은 체구에 비해 무거운 무쇠 웍을 잡고 면을 볶는 연습을 반복하며 끈기로 버텨낸 세월 덕분에 어머니의 뒤를 이어 요리를 전담하게 됐다. 남들과 다른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창의성과 열정 덕분에 대출을 감행해 고가의 큼지막하고 선도 좋은 새우를 납품받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풍성하고 맛 좋은 팟타이를 만들어 메뉴로 선보이게 된다. 값비싼 재료들을 사용하는 전략으로 길거리 음식에 대한 인식을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한 것이다.
100여 가지 메뉴 뚝딱…남다른 레시피들
현재 쩨파이 셰프가 만들 수 있는 메뉴는 100여 가지에 달한다. 물론 줄을 서서 맛을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상황이지만, 이 중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메뉴를 꼽자면 맑은 똠얌 수프와 튀긴 게살 오믈렛, 드렁큰 누들을 들 수 있다.
처음 쩨파이를 운영하던 무렵에는 술집과 도박장에서 온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고 가끔씩 음식을 포장해갔다. 쩨파이는 늘 응용을 더해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 내는데 일본식 오믈렛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장난스러운 반전을 꾀했다.
두툼한 살집의 게살을 거의 0.5㎏씩 계란 물에 추가해 뜨거운 웍 안의 기름 속에서 굴려가며 볼륨감 넘치는 비주얼의 ‘까이지에’를 만들어 냈다. 이 튀긴 게살 오믈렛은 보송보송하면서도 달큰한 게살 덩어리들로 가득 차 있다. 물론 들어간 게살의 호사스러움만큼이나 가격은 비싼 편이다. 내가 강력하게 추천하는 메뉴로 꼽는 똠얌 수프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다른 노선을 택했다. 코코넛 밀크를 더하지 않은 맑은 똠얌 수프는 풍부한 감칠맛의 육수를 위해 뼈를 잔뜩 넣어 맛을 뽑는다. 여기에 고추, 피시소스, 라임즙을 더한다. 맵고 짜면서도 시큼한 국물에 큼지막한 새우와 촉촉한 오징어가 시원한 맛을 낸다.
한국인이 해장국을 사랑하듯 태국인에게도 해장템으로 사랑받고 있는 ‘팟 키 마오’라는 이름의 드렁큰 누들은 풍성한 해산물에 두툼한 찰기의 누들이 더해져 맛과 양의 밸런스를 모두 만족시키는 메뉴다. 마늘과 바질에 더해진 숯불의 풍미와 짠맛과 매운맛, 은은하게 깔리는 단맛이 더해지는 그만의 비밀 소스가 만들어 내는 맛은 쩨파이에서만 맛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드라이 똠얌이나 게살 커리, 버미셀리 튀김과 해산물 등이 인기를 얻고 있다.
살아 있는 전설…팔뚝 위 아름다운 핏줄
2018년 미쉐린 1스타로 파격적인 등장을 한 쩨파이는 유일하게 하루 가게 문을 닫고 시상식에 참석했다. 그동안 살아온 고단한 인생을 인정받는 느낌이어서 무척 행복했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핀 미소가 참 아름다웠다. 숯불 앞에서 무쇠로 만든 무거운 웍을 혼자 돌려가며 매일 요리하는 그녀의 팔뚝에 돋은 핏줄과 단단하게 영근 근육은 그의 삶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값진 증거나 다름없었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 영업일을 조정하기도 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딸이 식당 운영을 돕기도 한다. 태국 셰프들의 셰프, 쩨파이의 활약으로 태국 정부가 가지고 있던 길거리 음식 산업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과 정책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쩨파이는 더 이상 단순한 미쉐린 스타 셰프가 아니라 태국 미식의 문화적 아이콘이다. 그는 앞으로 몇 년 안에 은퇴를 꿈꾸고 있으며 쩨파이를 자식들이나 후계자에게 물려주지 않고 그대로 문을 닫을 것이라고 했다. 살아 있는 전설이 될 그의 요리를 맛보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태국의 한 거리에서 줄을 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공식적인 인터뷰를 위해 직접 추가로 사진을 찍어 보내준 쩨파이의 딸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방콕=김혜준 푸드 콘텐츠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