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피아노 세팅이 끝나고 무대 뒷문이 열리자 임윤찬(19)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왔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자 지그시 눈을 감은 임윤찬은 곧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그가 들려준 모차르트는 ‘신세계’였다. 조성진의 연주가 모차르트의 악상 표현, 음악적 구조, 선율의 움직임을 정밀하면서도 또렷하게 드러낸다면, 임윤찬의 모차르트는 대담하고 열정적인 면이 강했다. 이런 표현도 가능하겠다. 조성진이 모차르트의 음악적 영혼을 온전히 흡수해 작품의 ‘정수’를 들려준다면, 임윤찬은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에 자신만의 색채를 덧입혀 ‘새로운 맛’을 보여준다고.
임윤찬이 이날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지휘 미하엘 잔데를링)와 들려준 작품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이었다. 모차르트가 쓴 최초의 단조 피아노 협주곡으로 비극적인 악상과 정교한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시작부터 순수하면서도 카랑카랑한 음색과 유연하면서도 가벼운 손가락 움직임으로 모차르트의 시적인 정취를 펼쳐냈다. 오른손으론 모차르트다운 깨끗한 트릴과 생동감 넘치는 리듬을 살렸고, 왼손으론 하나의 점을 향해 빠르게 손가락을 굴리면서 강한 추진력을 보여줬다.
임윤찬이 표현한 ‘모차르트의 슬픔’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애수라기보다는 내면 깊숙이 자리한 비참함을 토해내는 것에 가까웠다. 베토벤 작곡 버전의 카덴차(무반주 독주)에서는 격렬한 타건, 극적인 표현, 강하게 몰아치는 악상, 한 음도 허투루 내지 않는 집중력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의 긴장감을 선사했다.
2악장에선 피아노의 배음과 잔향의 효과를 섬세하게 조절하면서 모차르트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맑은 감정선을 그려냈다. 자연스럽게 선율의 흐름을 이끌면서도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게 연주하는 기법)은 귀에 꽂힐 정도로 선명했고, 음역에 따라 색채까지 바꿔가면서 풍성한 음향을 만들어내는 실력은 일품이었다.
3악장에선 비애와 활기, 역동성이 공존하는 악곡 특유의 묘한 매력을 제대로 살려냈다. 다소 빠른 템포였지만 임윤찬은 여유로웠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놀림과 명료한 터치로 건반 울림의 균질성을 유지하면서도 강조해야 할 표현은 귀신같이 짚어냈다. 그러자 모차르트 특유의 견고한 짜임새와 입체감이 살아났다.
베토벤 버전에 자신의 해석을 가미한 3악장 카덴차에서는 그야말로 피아노를 가지고 놀았다. 건반을 스치는 듯한 세밀한 터치와 맑은 음색으로 몽환적이면서도 찬란한 악상을 드러내다가 순식간에 건반을 누르는 강도와 속도를 높이며 감정을 극한까지 몰아갔다. 교향곡과 오페라에서나 느낄 법한 숨 막히는 압도감에 짓눌린 관객들은 터질듯한 박수와 환호성으로 긴장감을 풀어냈다.
첫 앙코르곡은 모차르트 ‘레퀴엠’ 중 ‘눈물의 날(라크리모사)’ 피아노 편곡 버전이었다. 임윤찬은 피아노에 반동이 생길 정도로 강하게 건반을 내려치면서 죽음을 앞둔 모차르트의 고통과 처절한 심경을 쏟아냈다. 다음 앙코르곡인 드보르자크의 ‘유모레스크’에선 명량한 음색과 자연스러운 루바토(템포를 자유롭게 연주)로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작품의 맛을 끌어냈다. 뜨거운 박수 세례는 임윤찬이 두 손으로 ‘X’ 표시를 하고 난 뒤에야 멈췄다.
공연의 또 다른 주인공인 루체른 심포니는 이날 최상의 컨디션은 아닌 듯 보였다. 임윤찬의 변화무쌍한 악상과 자유로운 템포에 유연하게 반응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다만 임윤찬의 폭발적인 에너지에 대응할 만한 응집력과 선율적 조형력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서곡에선 연주 속도, 연주법 등이 통일되지 않으면서 어수선한 인상을 남겼다. 멘델스존 교향곡 4번 ‘이탈리아’에서 보여준 잔데를링의 해석은 다소 평면적이었다. 장단조 선율의 명암, 악상 대비가 면밀히 표현되지 않았고, 악기 간 선율을 주고받는 타이밍도 어긋나면서 밸런스가 흩어진 양상을 보였다.
그럼에도 임윤찬 덕분에 빛난 공연이었다. 19세 청년은 피아노 하나로 자신의 음악 세계로 청중을 빨아들였다. 기함할만한 초고난도 기교도, 오케스트라의 장대한 울림도 필요 없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차르트가 임윤찬의 연주를 듣는다면, 이런 말을 건네지 않았을까. “자네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알았네. 내가 만든 음악을 이렇게 재밌게 칠 수 있다는 걸.”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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