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꽃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만에, 뜻하지 않게 마음속의 하늘을 그려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서예가 추사 김정희(1786~1867)의 마지막 난초 그림 '불이선란도'에 적힌 글귀다. 문화재청은 27일 '김정희 필 불이선란도(金正喜 筆 不二禪蘭圖)'를 비롯해 '기장 고불사 영산회상도' '파주 보광사 동종' '불조삼경' 등 조선시대 유물 4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불이선란도는 김정희의 묵란도(墨蘭圖, 묵으로 그린 난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이다. 그림 가운데에 옅은 묵으로 그려낸 난초 주위로 추사체(秋史體)로 적힌 글귀들이 더해진 작품이다. 세로 54.9㎝, 가로 30.6㎝ 종이 바탕에 수묵으로 그렸다.
작품은 김정희가 인도의 현인 '유마힐(維摩詰)'이 보살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유마힐경>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원리인 '선(禪)'을 여러 가지 말로 설명하는 보살에게 침묵으로 일관하며 '선은 둘이 될 수 없다(불이선)'는 의지를 보였다. 그림이 '불이선란도'라고 불리게 된 이유다.
그림 좌측 하단엔 작품의 제작 배경이 맵시 있는 추사체로 적혀 있다. "처음에는 달준(達俊)을 위해 거침없이 붓을 놀렸다"는 구절로부터 '달준'이란 인물을 위해 남긴 작품이란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작품엔 '난초를 서예의 필법으로 그려야 한다'고 본 김정희의 철학이 드러난다. 난초는 마치 중력을 거스르듯 여러 차례 꺾이고 휘갈긴 형태로 표현됐다. 옅은 묵으로 그려 힘이 없어 보이면서도 굴곡진 마디와 한 송이의 꽃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림의 오른쪽엔 "초서와 예서의 글씨체로 (난을)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이해하고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고 적혀 있다.
문화재청은 "19세기 문화사를 상징하는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 세계를 종합적으로 대변하는 작품으로 학술적·예술적 의의가 크다"며 "인장을 통해 전승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4건의 문화유산은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친 뒤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된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