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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골목의 소라고둥…어른들이 숨어드는 나만의 아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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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는 비밀이 생명입니다. 남들은 모르는, 나만 아는 공간에서 취향을 만끽하는 시간은 달콤하죠. 아지트라는 단어 자체가 옛 소련 지하운동본부를 뜻하던 러시아어 ‘아지트풍크트’에서 유래했어요.


지난해 문을 연 서울 이태원 서점이자 북카페 ‘그래픽’은 알 만한 사람만 아는 아지트였죠. 조용한 주택가 골목에 자리 잡고 있어요. “거기 진짜 좋은데, 기사로 소개하실 거예요? 사람 너무 많아지면 안 되는데….” 제가 그래픽에 가보려고 한다니까 누군가는 이런 말도 했어요.

하지만 얼마 전 연애 관찰예능 프로그램 ‘하트시그널’ 속 데이트 장면으로 그래픽이 등장하는 걸 보면서 깨달았어요. 이곳은 이미 모든 ‘어른이’의 아지트가 됐다는 걸요.

처음 입소문이 난 건 예사롭지 않은 건물 디자인 덕분이었죠. 층층이 쌓인 건물 모양에다 세로로 결이 난 흰색 겉면은 조각케이크나 소라고둥 같기도 하고, 두꺼운 책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겉면은 마치 책 단면처럼 세로로 결이 나 있고요. 왜 어른이들은 이 소라고둥에 자꾸 숨어드는 걸까요.

그래픽 건물 지하 주차장 입구 반대편, 건물 옆쪽 두꺼운 철문을 밀고 들어가면 어둡고 고요한 복도가 나타납니다. 마치 숨을 고르고 새로운 세계에 입장할 준비를 하라는 듯이 말이죠. 곧이어 자동문까지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그래픽의 세상이 펼쳐집니다. 누가 ‘그래픽’ 아니랄까 봐 카운터에서 QR코드를 스캔하면 자체 인터넷 사이트로 연결되고, 여기서 만화로 이용 안내를 해줍니다. 총 세 개 층으로 구성된 이곳에는 다양한 책과 좌석이 갖춰져 있어요.


입장료 1만5000원을 내면 운영 시간인 오후 1시부터 11시까지 시간제한 없이 이곳에 머물며 책을 마음껏 꺼내 읽을 수 있습니다. 디자인·건축·영화 서적, 마블과 DC코믹스 책부터 시대극, 힐링물까지. 1만5000원을 내고 일종의 놀이공원 자유이용권을 사는 셈이죠.

좌석은 취향껏 택하면 됩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앉는 커다란 책상이 있고, 눕다시피 기댈 수 있는 소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편한 자세로 만화책을 읽고 있었어요. 물과 차, 음료수도 3층 냉장고에서 무료로 꺼내 마실 수 있어요. 추가 금액을 내면 맥주 샴페인 위스키 등 주류와 간단한 안주를 이용할 수 있고요. 단, 주류를 판매하는 곳이기 때문에 어른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책의 매력을 온전히 즐기도록 노트북은 이용 금지입니다.

“누가 책을 읽느냐”는 시대지만 그래픽은 주말마다 줄 서서 들어가는 책방입니다. 쾌적한 독서를 위해 인원 제한이 있어요. 입구에 ‘현재 만석입니다’ 안내문이 붙어 있어도 놀라지 마세요. 대기 목록에 휴대폰 번호를 올려두면 입장 순서가 다가올 때 카카오톡으로 알림을 보내줍니다.

교복 입고 다닐 때 책가방이나 책상 서랍에 몰래 만화책을 숨겨두고 읽었던 사람들에겐 천국과도 같습니다. 가벼운 술 한 잔을 곁들인 채 낄낄거리며 만화책을 읽는 맛은 어른이만 알죠.

3층 천장에 창을 낸 덕에 햇살이 골고루 쏟아져 들어오고, 그 빛을 벗 삼아 책장이 절로 넘어갑니다. 주제나 시기에 맞춰 읽을 만한 책을 큐레이션 해주는 것도 이곳이 특별한 이유입니다. 올초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개봉 이후 일본 인기 농구만화 <슬램덩크>를 다시 읽는 분들 많으시죠? 그래픽 2층에서 <슬램덩크>를 ‘정주행’할 수 있어요. 모든 시리즈를 쭉 모아놨답니다.

“그거 1권 다 읽었어? 재밌어? 나도 볼래. 바꿔 읽자.” 책상 맞은편에서 속삭이는 연인은 아지트의 또 다른 뜻을 떠올리게 했어요. 아지트를 국어사전에 찾으면 제일 먼저 이런 뜻이 나오거든요. ‘어떤 사람들이 자주 어울려 모이는 장소.’

아지트는 아끼는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진가를 드러내고, 어른이 돼도 만화책은 역시 함께 읽어야 제맛입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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