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파울 뷔르크너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명예회장은 미·중 기술패권 전쟁과 관련, “한국뿐 아니라 미국·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 많은 기업이 지금 엄청난 압박에 놓여 있다”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스스로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세계 50여 개국에 지사를 둔 BCG를 20년 가까이 이끌었다.
뷔르크너 회장은 “리스크를 분산하며 미·중 모두와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서도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유럽의 사례에서 보듯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4년 만에 방한한 그를 지난 7일 서울 BCG 본사에서 만났다.
▷한국의 주요 기업 총수를 만나며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한국의 기업 총수와 최고경영자(CEO)들은 정말 야심 찬(ambitious) 사람들입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구축하고자 할 때 특히 그렇습니다. 그 덕분에 한국 기업들은 스마트폰, 반도체, 자동차, 원자력 발전, 영화 등 많은 산업 분야에서 공고한 위치에 올랐습니다.”
▷전 세계 CEO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입니까.“요즘은 비용 절감과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고민이 많습니다. 세계적으로 경제 성장은 둔화하는데 인플레이션, 에너지 공급난 등 불안 요소는 많기 때문입니다. 첨단 기술 동향을 기민하게 파악하려는 노력도 많이 하고요. 요즘의 화두는 물론 인공지능(AI)입니다. 인재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방법도 많이 묻습니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 끼인 형국입니다.“어느 한 국가나 특정 산업, 특정 생산 시설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도록 리스크를 분산하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미·중 양쪽과 계속 소통하고 협력해야 하지만 최악의 시나리오에도 대비해야 합니다. 우린 이미 유럽의 사례를 봤습니다.”
▷탈세계화 흐름이 앞으로도 계속될까요.“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중국 쌍순환 전략 등은 공급망의 지역화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게 탈세계화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단지 세계화의 양상이 바뀌고 있을 뿐이죠. 기업들은 끊임없이 공급망을 점검하고 다각화하며 의존도를 분산해야 합니다. 고객 및 납품사와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도 중요해졌습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심각합니다.“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 비용과 농산물 가격을 급격하게 끌어올렸습니다. 인플레이션은 경제, 특히 서민의 삶에 파괴적입니다. 지금은 인플레이션과 싸우는 게 중요합니다. 긴축 노력을 계속한다면 내년엔 인플레이션 목표치인 2% 안팎에 도달할 것으로 봅니다.”
▷경기 침체 우려도 여전합니다.“인플레이션 대응이 우선이기 때문에 올해 세계 경제 성장 둔화는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미국 경제는 여전히 역동적(vibrant)입니다. 실업률은 낮고 소비는 강합니다. 지금은 침체기라기보다 수년간 흘러넘쳤던 유동성을 축소하고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조정 국면이라고 봅니다.”
▷한국은 인구절벽 문제도 안고 있습니다.“인구가 줄어드는 국가에 성장을 기대하긴 힘듭니다. 성장은 경제적 문제일 뿐 아니라 정서적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당장 내 생활 수준이 낮아진 게 아니더라도 사회가 정체돼 있다는 정서는 사회 구성원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저출생 사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약 0.7명 수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준인 대체출산율 2.1명에 크게 미치지 못하죠. 인구구조 변화에 대응해야 합니다.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는 동시에, 초고령사회에서 어떻게 생산성을 유지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년 연장, 자동화 등을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한국 기업에 또 다른 과제입니다.“ESG를 위한 노력이 경제성에 어긋나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공장을 효율화할 경우 오히려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됩니다. 실제로 BCG는 제철소, 시멘트 공장, 정유 공장 등이 에너지 소비를 크게 줄일 수 있도록 협력하고 있습니다.”
▷AI 등 산업 전환에 대한 필요성도 커지고 있습니다.“챗GPT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AI는 유행이 아닙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처럼 모든 산업과 사회를 바꿔놓을 것입니다. 생산성 향상에 집중해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부작용에 대한 걱정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미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걱정만 하고 있다간 기회를 놓칩니다.”
▷한국은 AI 분야에서 어떤 위치에 있다고 보나요.“이 분야는 방대한 데이터세트를 먹고 자랍니다. 인구가 적은 한국 기업들이 미국이나 중국을 따라잡기 힘든 게 사실이죠. 하지만 과감한 투자와 새로운 시도를 계속한다면 길은 있을 것입니다. 10~20년 뒤 세계 10대 기술 기업 목록은 지금과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이 목록에 한국 기업이 속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K콘텐츠도 한국의 새로운 먹거리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까요.“K팝 K무비 등 K콘텐츠는 10~15년간 세계 점유율을 높여왔습니다. 하지만 소셜미디어와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의 비약적 발전으로 사람들은 이제 지역이나 언어에 상관없이 너무나 쉽게 새로운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K콘텐츠의 위상을 지키려면 지속적으로 독창적인 작품이 나와야 합니다.”
▷진정한 혁신이란 뭐라고 생각합니까.“혁신이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의 내용뿐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방식까지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것, 즉 전방위적으로 새로운 걸 시도한다는 뜻입니다.”
빈난새/구은서 기자 binthe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