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펼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에게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쥘 수 있는 ‘미스터 에브리싱(Mr.Everything)’으로 통하는 그가 핵무장을 원하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면서다. 빈살만 왕세자는 미국과 패권경쟁을 펼치고 있는 중국과의 외교 접점을 늘리면서 “우라늄 농축을 허용해 달라”고 미국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미국이 중동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선 이슬람 수니파의 좌장인 사우디와의 관계 회복이 필수다. 일대일로 사업의 핵심 파트너로 아랍 국가들을 끌어들여서 이 지역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는 중국도 견제해야 한다. 다만 사우디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핵확산 방지 원칙을 깨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럽다.
원전 수출에 사활을 건 한국도 사우디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국의 사우디 원전 수출도 미국과 사우디의 핵 협상에 달려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어서다. 사우디는 미국이 우라늄 농축을 허용할 경우 한국 원전을, 불허용할 경우 중국 원전을 택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 원전 수주, 한·중 2파전
정부와 원전 업계에 따르면 1.4GW 규모 원전 2기 건설을 추진 중인 사우디가 미국에 ‘우라늄 농축 허용’을 요구하면서, 이를 미국이 수용한다면 사우디 원전 건설을 미국의 우방인 한국에 맡기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라늄 농축 허용은 곧 핵무기 생산 능력 확보를 의미한다. 원전의 원료인 우라늄 농축도가 90%를 넘어가면 통상 핵무기 개발 능력을 확보한 것으로 본다.사우디 원전 수주전에는 한국을 비롯해 러시아와 중국이 후보로 초대돼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가 사실상 후보군에서 제외된 점을 감안할 때 한국과 중국의 2파전 양상이다. 사우디는 올 연말까지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해 원전 사업자 선정을 매듭짓는다는 방침이다. 사우디는 이미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에서 시공 능력을 입증한 한국을 내심 바라고 있다는 후문이다. 가장 싸고, 안전하고, 빠르게 원전을 지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단 한국은 미국과 원전 동맹을 맺고 있어서 미국의 동의 없이 독자적으로 사우디와 계약을 맺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사우디는 원전 건설을 맡길 또 다른 후보로 중국을 고려하고 있다. 사우디가 한국이 아닌 중국을 원전 파트너로 선택하는 것은 미국엔 악몽이다. 이는 사우디가 중국과 ‘원전 건설+우라늄 농축 기술 전수’라는 패키지딜에 합의했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우디가 미국과의 비공개 협상에서 한·미 원전 동맹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우라늄 농축을 허용해주지 않을 경우 중국에 원전 건설을 맡기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중동 전문가인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는 “우라늄 농축을 허용하지 않으면 중국과 함께 핵무장에 돌입하겠다는 게 사우디의 전략”이라며 “사우디는 이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원전 수출 자문단에 소속된 한 전문가도 “사우디가 핵 문제를 풀어주지 않으면 원전 건설을 중국에 맡기겠다는 협상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사우디는 핵확산 금지 조약(NPT) 가입을 원전 건설의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는 미국의 태도에 일관된 반대입장을 표명해 왔다”며 “핵 문제에 관한 미국과 사우디 간의 대화가 풀려야 한국 원전 수출이 가능해지는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난처한 미국의 선택은
중동의 대표적 친미 국가인 사우디는 강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사우디 경제 재건에 나선 빈살만 왕세자가 전면에 등장한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삐걱대고 있다. 석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구조에 한계를 느낀 빈살만은 원유 자원을 지렛대로 세계 주요 국가와 경제 협력을 늘리고 있다. 2030년까지 사업비 660조원을 들여서 북서부 홍해 인근에 초대형 미래도시를 건설하는 ‘네옴시티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빈살만은 외교 분야에서도 미국 일방주의 노선을 버리고 미국의 최대 경쟁자로 부상한 중국과 손을 잡는 ‘배짱 외교’를 펼치고 있다. 미국의 눈엣가시인 중국을 끌어들여서 사우디의 몸값을 높이는 전략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핵심 프로젝트인 일대일로 사업을 성공시켜야 하는 중국도 이같은 사우디의 변신이 반갑다. 중동이 중국으로 돌아서는 것은 미·중 패권경쟁의 구도를 뒤바꿀 수 있는 중대한 변화라는 점에서다. 중국 기업들이 사우디에 진출해 사우디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고, 중국은 사우디로부터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양측이 협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사우디가 지난 3월 원유를 달러로만 사고파는 ‘패트로 달러’ 체제를 깨고, 원유 거래를 위안화로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두 국가의 강화된 협력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평가다. 오랜 앙숙인 사우디-이란의 국교 정상화도 지난 3월 중국의 중재로 성사되면서 미국은 또 한번 체면을 구겼다.
이같은 사우디의 행보에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도 큰 원인이 됐다. 무엇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2018년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의 배후로 빈살만 왕세자를 지목한 게 결정적 역할을 했다. 빈살만은 이를 미국의 내정간섭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 2021년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결정은 이란에 대한 사우디의 안보 불안을 증폭시켰다. 미국이 더 이상 사우디를 보호할 의사가 없다는 해석도 가능한 행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에 빈살만은 미국을 대체할 새 안보·경제 파트너로 언제든지 중국을 선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워싱턴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게 중동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美의 사우디 달래기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미국은 사우디 달래기에 나서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의 리더격인 사우디가 중국과 한배를 타는 것은 미국이 허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제 유가 안정화 요구’에도 빈살만이 감산으로 맞불을 놓고 있지만, 미국은 특별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대신 사우디와 관계 개선을 위한 물밑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는 외교가의 전언이다. 미국-이스라엘-사우디 간의 삼각동맹은 향후 중동 지역 정세 변화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가늠자가 될 수 있다. 이 삼각동맹이 타결되면 중동 평화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 간 충돌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가 마련될 수 있다. 앞서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은 UAE와 ‘아브라함 평화협정’을 맺고 경제협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기술력과 UAE의 자금력을 하나로 모아서 양국의 경쟁력 강화를 도모하자는 것이다. 경제교류 활성화를 통해서 이슬라엘과 아랍국가 간에 쌓인 오랜 정치적 갈등도 해소해 나가자는 게 아브라함 동맹의 취지다. 여기에 사우디까지 합류할 경우 시아파 이란에 맞서는 강력한 중동 연합이 결성될 수 있다.
물론 삼각동맹은 풀기가 쉽지 않은 퍼즐이다. 첫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전향적 입장 전환이 전제되어야 한다. 최소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력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둘째, 사우디의 우라늄 농축 허용 요구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한 마당에 자국의 안보를 지키는 방법은 핵무장밖에 없다는 게 빈살만의 판단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란 제재 완화 검토하는 까닭은
외교 소식통 등에 따르면 미국은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 완화를 검토하는 등 반미 국가의 선봉 격인 이란과도 물밑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우선 전격적인 경제 제재 해제에 앞서 이란의 해외 동결 자금을 풀어주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미국은 2018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합의(JCPOA)를 파기하고 재차 경제제재에 돌입한 이후 이란과 공식 대화를 재개하지 못하고 있다. 이 탓에 한국은 이란에 원유 결제 대금 70억 달러를 돌려주지 못한 상태다.이 돈을 이란 주변 중동 국가의 은행에 예치한 뒤 이란이 이 돈을 국제기구 분담금 등 특정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미국이 대선 전에 이란 관계 전면 복원을 시도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다만 이란에 일정 수준의 당근책을 제시해 중동 지역 긴장 완화를 도모할 유인은 많다”고 말했다.
이란에 대한 제재 완화 움직임이 사우디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란과 미국이 ‘핵 합의’를 다시 받아들일 경우, 이란의 위협을 근거로 핵무장을 주장하는 사우디의 명분이 사라진다는 점에서다. 이란 핵 합의는 미국·프랑스·영국·러시아·중국·독일 등 6개국이 2015년 이란과 체결한 합의다. 이란이 핵무기 개발 노력을 중단하는 대가로 대이란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핵 합의에 따르면 이란이 최대로 농축할 수 있는 우라늄 농도는 3.67%다.
하지만 트럼프가 핵 합의를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대이란 제재를 복원하자, 이란도 그다음 해부터 우라늄 농도를 높이고, 비축량도 늘려 왔다. 이란의 우라늄 농도 60%까지 농축 수준을 높였고, 최근에는 핵무기 제조 수준에 버금가는 농도 83.7%의 우라늄 입자가 발견됐다는 국제원자력기구의 보고도 전해졌다.
미국이 중동 ‘빅딜’에 성공할 수 있을까
이란과 미국의 관계 악화는 사우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란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는 것은 사우디에 심각한 안보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기존 이란군의 전력이 사우디를 압도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빈살만 왕세자가 권력 유지에 위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이 탓에 사우디가 핵무장을 주장하는 것은 이란 문제를 감안할 때 엉뚱한 주장은 아니라는 게 외교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석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원전 건설을 추진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우라늄 농축 기술도 확보하겠다는 게 사우디의 속내라는 것이다. 성일광 고려대 교수는 “이란이 핵무장에 나서면 사우디도 맞불을 놓을 수밖에 없다는 게 사우디의 기본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미국은 사우디 문제를 풀기 위해선 이란 문제도 함께 풀어야 한다. 미국이 이란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는 이유다. 한국의 입장만 놓고 보면 사우디의 우라늄 농축을 미국이 허락해주고, 사우디와 이란이 나란히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NPT에 가입하면 핵무기를 가질 수 없고, 보유 핵 자산에 대한 사찰을 상시로 받아야 한다. 다만 NPT 가입을 이란과 사우디가 받아들일 경우 미국도 사우디에 우라늄 농축을 허용해 줄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이 경우 한국도 사우디 원전 수출 9부 능선을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사우디 원전 수주가 성사될 경우 향후 잇따라 펼쳐진 원전 수출 경쟁에서 한국은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UAE 바라카 원전팀이 그대로 사우디 원전 건설에 돌입할 수 있다는 점도 효율적이다. 무엇보다 미국 원전업체 웨스팅하우스의 소송으로 답보상태인 한미 원전 동맹도 실질적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이 사우디·이란과의 협의를 제대로 종결짓지 못하고, 사우디가 중국을 선택하는 것은 한미 모두에 최악의 시나리오다. 사우디가 중국 원전을 선택할 경우 중국의 묵인 아래 핵 개발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경우 중동 정세는 또 한 번 요동치면서, 미·중 갈등의 격전지로 부상할 전망이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는 “사우디는 기본적으로 친미 국가이고, 이란도 실질적으로는 중국보다는 미국에 대한 신뢰가 높다”며 “다만 미국이 중동 문제 해결의 교두보를 이번에 마련하지 못할 경우 중동 지역 전체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지훈/박한신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