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민주사회는 건강한 시민의식 없이 유지되기 어렵다. 건강한 시민의식은 활기찬 출판문화 없이 유지되기 어렵다. 역사적인 선례가 이를 증언한다.
18세기 영국으로 돌아가 보자. 본격적으로 양당 중심 의회정치 체제가 가동된 시발점은 1688년 명예혁명이지만, 1695년 ‘출판인허가법’ 소멸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1662년 제정됐다가 1685년에 7년 한시적으로 다시 연장된 출판인허가법의 정식 명칭은 ‘체제전복적이고 반역적이고 허가받지 않는 출판물들로 인한 해악을 예방하는 법’이었다. 이 법으로 국가는 런던 출판업자 길드를 통해 출판시장을 통제하고 출판물에 대한 사전검열을 시도했다. 영국 하원은 1695년 해당 법의 유효 기간이 종료되자 법안의 수명을 더 늘리거나 유사한 법을 새로 제정하지 않았다. 이 법은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이후 언론출판 자유시장이 활개 치며 도약했다. 반대 진영 간의 정치 싸움도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 출판물을 통해 전개됐다. 저자들은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심지어 국왕에 대한 풍자도 너무 심하지 않은 한 허용됐다.
현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21년 출판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출판업의 총매출은 약 3조8728억원이다. 적지 않은 수치로 보일지 모르나, 같은 해 한 투자기관이 추정한 K팝의 ‘팬덤 비즈니스 시장’ 규모만 약 8조원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1년 기준 콘텐츠사업조사’에 따르면 K팝 등이 대표하는 한국 콘텐츠산업 수출액은 14조3000억원에 육박했다. 반면 한국 출판업 총매출에서 해외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0.5%에 불과했다. 매출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범주는 ‘학습지’와 ‘교과서 및 학습참고서’였다. ‘일반단행본’이 그 뒤를 따르긴 하나 학습지 매출의 반 정도밖에 안 된다. 상위권을 차지한 두 범주에다 이들과 성격이 비슷한 ‘수험서’ 매출까지 합하면 전체의 약 60%다. 대한민국의 출판시장은 정체돼 있고, 교양을 키워주는 단행본이 아니라 교육열에 기댄 실용 출판물 덕에 그나마 수익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인구가 줄고 있다는 걱정들을 많이 한다. 인구만 주는 게 아니다. 1988년 신문 기사를 보니 그해 국민 1인당 연 독서량은 3.75권이었다. 2019년 한국출판저작권연구소는 국민 1인당 월평균 도서구입비가 5000원에도 못 미친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평균 서적 가격이 1만원 중반이니까 1인당 0.5권도 구입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도서관에서 대출해 책을 읽는 경우도 있기는 하겠으나, 이 수치에 영향을 줄 정도일 리 만무하다. 2022년에는 책을 안 사고 안 읽는 추세가 더 심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젊은 층으로 내려갈수록 긴 호흡으로 사색하며 저자와 대화하는 독서를 회피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세대와 상관없이 전반적으로 한순간 방영되다 사라지는 시각 매체에만 의존하거나, 짧은 SNS 속 댓글을 읽으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확정하는 추세가 일상화되고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민들은 선동과 여론조작이 삼켜 먹는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책을 펼쳐 들지 않고 오직 컴퓨터나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사는 유권자가 절대다수가 되면, 건전하고 합리적인 개인들의 소신은 무시당할 것이다. 그 대신 편견과 혐오, 집단적 동질감을 부추기는 여론몰이가 기승을 부릴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민의를 대변한다는 민주주의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민’ 스스로 자신의 ‘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무슨 ‘민의’를 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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