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서 인간으로.” 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양 미술의 500년 역사는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중세까지만 해도 서양 미술은 종교와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데 치중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가 오자 그림에도 ‘인간’이 담기기 시작한다.
귀족들의 초상화 제작이 보편화되고, 풍경화가 천상과 신화 속 세계가 아니라 실제 세상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시기가 이때다. 근세에 이르면 화가들은 주변의 평범한 인물 및 풍경을 자신의 생각과 관점에 따라 자유롭게 표현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인상주의의 탄생이다.
전 세계 미술관들은 지난 수십년간 이런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주제로 한 전시를 수없이 열었다. ‘세계 10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영국 런던의 내셔널갤러리도 마찬가지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지금 열리고 있는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는 내셔널갤러리가 오랜 세월 쌓아온 소장품과 전시 구성 노하우를 압축해 가져온 전시다. 크리스틴 라이딩 내셔널갤러리 학예실장은 “우리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을 엄선해 ‘내셔널갤러리 압축판’을 만들고자 노력했다”며 “미술사의 중요한 흐름, 중요한 예술가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셔널갤러리가 호언장담할 만큼 작가들의 이름값이 그야말로 화려하다. 르네상스부터 인상주의를 아우르는 작품 52점이 나왔는데, 전시 시작부터 15세기 거장인 라파엘로와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직후 티치아노와 틴토레토 등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의 거장들에 이어 카라바조의 대표작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초상화가 관객을 맞는다.
국적과 시대를 가리지 않고 ‘초특급 화가’들의 명단이 이어진다. 17세기에는 프랑스 출신인 클로드 로랭과 니콜라 푸생을 비롯해 네덜란드 풍속화가 얀 스테인과 해양화 대가 빌럼 판 더 펠더, 초상화 거장 반 다이크가 등장한다. 18~19세기 중에서는 고야의 초상화 ‘이사벨 데 포르셀 부인’과 토머스 로렌스의 ‘찰스 윌리엄 램튼’(레드 보이),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와 존 컨스터블의 작품이 눈에 띈다. 마지막 인상주의 부문에서는 폴 세잔과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빈센트 반 고흐, 에두아르 마네, 폴 고갱, 클로드 모네 등 친숙한 이름이 연달아 등장한다.
화가들의 이름값에 비해 작품만 봐도 제목이 떠오를 정도의 ‘특급 작품’ 수는 많지 않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수준 높은 ‘A급 작품’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한쪽 시대나 화파에 치중하지 않고 거장들의 작품을 고루 모아 보편적인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다만 하늘색과 분홍색 등 가벼운 벽면 컬러 때문에 작품 감상이 다소 방해된다는 지적도 있다. 전시는 10월 29일까지 열리며 입장료는 1만8000원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