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리멤버’를 봤다. 80대 알츠하이머 환자가 일제강점기 시기 친일파로 활동했던 이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그가 복수해야 할 대상 중 한 명이 외친다. “우리는 그냥 그 시간을 살아간 것뿐이야!” 대사를 듣자마자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떠올랐다. 악의 평범성이란 나치 시절 유대인 학살이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됐음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던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라가 내린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말해 재판장 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악의 평범성은 무비판적이고 방관하는 태도만으로 누구나 희대의 악행을 저지를 수 있음을 꼬집는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은 평범한 사람들이 “예”라고 말할 용기를 약하게 만들었다. 온라인 세상에서는 내 생각과 동일한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나와 다른 의견을 수용하고 내 사고방식을 바꿀 동기가 줄어든다. 오히려 나와 동조하는 사람들과 합세해 ‘우리와 다른 사람’을 향한 무차별적 마녀사냥을 일삼기도 한다. 무심하게 스마트폰을 쥔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며 세상 일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무뎌져 가는 건 아닌지 새삼 무서워진다.
오프라인에서의 집단생활도 마찬가지다. 악의 평범성을 경계해야 살아남는 대표적 집단이 바로 회사다. 기본적으로 회사는 다양한 사람이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정한 약속을 만들어 그에 맞게 일하는 곳이다. 이 약속이 우리가 말하는 그 기업의 ‘조직문화’다.
훌륭한 조직문화는 웃음기 넘치는 업무 분위기와 화려한 직원 복지가 아니다. “우리 회사가 최고”, “굳이 나만 반대 의견을 내지 말자” 식의 생각들로 가득 찬 화목하고 평범한 회사 분위기는 조직에 닥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인턴이 최고경영자(CEO)를 영어 닉네임으로 부르는 이유가 그저 ‘힙’한 회사로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다. 직급을 막론하고 누구나 소신 있는 의견을 낼 수 있는 조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장치임을 깨달아야 한다.
내일은 현충일이다.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장병을 애도하는 날이다. 영어로 ‘Memorial Day’인 만큼 이날은 국민으로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자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며 악의 평범성을 온몸으로 저항한 이들을 향한 존경을 보내는 날인 것이다.
문득 내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 합리적이고 당연하게 돌아간다고 여겨진다면 나를 세상의 중심에서 떨어뜨려 멀리서 바라보자. 나 자신마저 속일 만큼 세상을 당연하게 수용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그 순간이 악의 평범성에서 벗어날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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