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를 위한 진혼곡이 될 것 같구나.”
1791년 12월 4일. 오스트리아 출신의 천재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작곡 중이던 ‘레퀴엠’ 중 ‘눈물의 날(라크리모사)’ 선율이 귓가에 들려온 때였다. 모차르트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 음악 ‘레퀴엠’을 작곡하면서 한발 한발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처연한 노랫소리에 무너진 모차르트는 이튿날 새벽 1시 서른다섯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최후의 걸작 ‘레퀴엠’이 미완으로 남은 채였다.
모차르트의 직접적인 사인은 지금까지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지독한 생활고와 과로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데에는 이견이 없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서른 무렵부터 몸을 혹사했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같이 작곡에 매달려야 했다. 레퀴엠 작곡 의뢰가 들어왔을 때도 이미 할 일은 산더미였다.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 ‘마술피리’ 초연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었다. 살인적인 일정을 겨우 소화하면서도 레퀴엠을 맡기로 결심한 것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대학교수 연봉의 5배에 달하는 작곡료와 그의 절반을 선수금으로 지급.’ 그해 여름 모차르트를 찾아온 신원 미상의 남성은 그렇게 모차르트의 승낙을 받아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모차르트에게 레퀴엠 작곡을 의뢰한 남성은 발제크 백작이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작품을 받아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처럼 주변에 선보이기 위해 거금을 들인 것이었다.
작품이 밀려 있던 탓에 레퀴엠 작곡은 주문받은 지 석 달 뒤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마침내 작곡할 짬이 났지만 문제가 있었다. 모차르트의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는 것이다. 모차르트 전기를 출간한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1761~1826)은 당시 모차르트에 대해 이렇게 썼다. “병색이 완연했으며 약을 계속 먹어야 했다. 표정은 창백했고 눈은 멍하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빈 주재 덴마크 영사였던 니센은 모차르트가 두고 떠난 아내 콘스탄체의 새로운 남편이자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를 깊이 이해한 인물이었다.
심각한 두통과 전신 통증, 망상에 시달린 모차르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제자 쥐스마이어의 도움을 받아 레퀴엠 작곡을 이어가야 했다. 그렇게 모차르트가 온전히 작곡을 마친 부분은 ‘입당송’(미사에서 사제가 나올 때 신자들이 외는 기도문) 전체와 ‘부속가’ 중 여섯 번째 악곡 ‘눈물의 날’의 첫 여덟 마디였다. 완성하지 못한 부분은 모차르트가 남긴 지시와 스케치, 주요 성부 및 음형 등을 토대로 쥐스마이어의 손으로 채워졌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대표하는 악곡은 단연 ‘눈물의 날’이다. 모차르트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치열하게 고민한 곡으로 죽음을 앞둔 그의 비통한 심경이 담겨 있다. 곡은 처연한 음색의 바이올린 선율로 문을 연다. 마치 눈물을 한 방울씩 천천히 떨어뜨리는 듯한 묘한 리듬이 짙은 슬픔을 드러내면 이내 4부 합창이 서늘하면서도 조용한 목소리로 애절한 선율을 토해낸다. 고통을 목뒤로 삼켜내듯 제한된 음량에서 고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움직임은 긴장감을 서서히 고조시키는데, 이때 짧게 끊겼던 음들이 하나의 길고도 거대한 선율로 이어지면서 격앙된 악상을 펼쳐낸다.
저음의 육중한 음색과 고음의 애달픈 음색이 하나의 두꺼운 선율을 이루며 만들어내는 입체감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압도적이다. 후반부에서 현악기, 관악기, 팀파니로 장대하게 연주하는 주제 선율과 베이스 성부를 중심으로 켜켜이 선율을 쌓아 만들어내는 합창의 웅장한 앙상블에 온 감각을 집중한다면 모차르트가 그려낸 극도의 절망감과 고통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