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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노망났네"…자기 몸 줄로 묶은 '스타'에 발칵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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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도대체 뭘 그린 거야? 석회 반죽을 비누 거품이랑 섞어서 발라놓은 것 같네. 제목은 또 왜 이래?”

1845년 영국 왕립아카데미 전시장. 그림 앞에 선 관객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작가의 이름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1775~1851). 탁월한 그림 실력으로 젊을 때부터 최고 화가로 군림한 그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려대기 시작했습니다. 벽돌 가루, 유황, 생선을 담은 그릇, 주방용품…. 그의 그림에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갑자기 전시장에서 웅성거림이 잦아들었습니다. 관객들의 반응을 보러 온 터너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싸늘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터너는 항변했습니다. “이해 못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이 그림을 그리려고 배를 타고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나갔어. 거기서 돛대에 내 몸을 묶고 네 시간이나 바다를 관찰했거든. 그러면 이런 게 보인다고.”

전시장을 나오며 사람들은 씁쓸하게 얘기했습니다. “선생님이 이제 노망이 드셨나 봐요. 그, 아시잖아요. 선생님 집안 내력이….” “그러게나 말이야, 이렇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모친에게 물려받은 정신 질환이 도진 것 같아.” 터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룹니다.
‘심술궂은 신동’, 혜성처럼 등장

이 작품은 터너가 24살이 되던 1799년 그린 자화상입니다. 잘 그린 그림입니다. 남자다운 외모의 젊은이가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눈빛도 꽤 자신만만하지요. 뛰어난 실력 덕분에 20대 초반에 ‘미술계 스타’로 떠올라 왕립아카데미 준회원까지 됐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 다른 사람들이 남긴 기록과는 거리가 멉니다. “독수리 부리보다 더 큰 매부리코에 머리는 컸고 이마는 낮았다. 키는 5피트 4인치(162cm), 허리 치수는 35인치였다. 농부나 선원, 현장 노동자처럼 생겼다.” 한마디로 ‘뽀샵’을 심하게 한 거지요.

이 그림에서 터너의 성격을 설명하는 두 가지 키워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천재성’과 ‘열등감’입니다. 그는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때부터 돈을 받고 작품을 팔 정도로 그림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강한 열등감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터너의 키는 또래보다 작았고 외모는 볼품없었습니다. 말재주도 없었고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어머니는 8살 때 정신질환으로 입원했습니다.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과 사랑도 터너의 성격이 괴팍해지는 걸 막진 못했습니다.


성격은 안 좋아도 그림 실력만큼은 제대로였습니다. 터너가 영국 미술계의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한 건 불과 스물한 살이던 1796년. 영국 왕립아카데미에 전시한 그의 작품 ‘바다의 어부들’을 본 평론가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가 천재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앤서니 파스킨)고들 했지요.

1799년 왕립 아카데미 준회원 선임, 1802년 왕립 아카데미 정회원 선임, 1804년 개인 화랑 개업…. 순식간에 터너는 최고 화가의 반열에 올라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30세도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갔나…쏟아진 혹평


그런 터너의 얼굴은 항상 붉었다고 합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매일같이 바깥 풍경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며 햇빛과 바람, 비에 노출된 탓이었습니다. 새로운 풍경을 보기 위해 여행도 자주 했습니다. 그만큼 그는 엄청난 노력파였습니다. 예술에 방해될까 봐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친한 친구는 몇 없었습니다. 툭하면 빈정대고 쉽게 화를 내는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조차 터너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론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원근법이나 기하학적 지식은 왕립 아카데미의 원근법 교수로 위촉될 만큼 뛰어났습니다. 말재주가 없었던 탓에 강의 평가는 좋지 않았지만요. 천재성에 이런 노력을 더한 끝에 마침내, 터너는 이때까지 다른 화가들이 한 번도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에 오르게 됐습니다. 실제 모습을 따라 그리는 걸 넘어 빛과 색채 그 자체를 직접 다루기 시작한 겁니다.


해가 지는 모습을 그린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공을 들여 자세히 그린다고 해도,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모습과 색을 물감으로 캔버스에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하는 건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해가 지는 광경을 보고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명확하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이라는 느낌을, 터너는 빛·그림자·색채를 통해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정확한 묘사보다는 본질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것. 그게 그림의 목적이자 화가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 겁니다.


40대에 들어 그는 본격적으로 빛과 색채의 실험을 시작합니다. 프랑스에서 ‘인상주의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가 태어나기 수십년도 전에 인상주의와 추상화로 발을 내디딘 겁니다. 하지만 너무 일렀던 걸까요. 그림에는 “병에 걸려서 앞을 제대로 못 보는 노인이 본 장면 같다” “무미건조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혹평이 쏟아졌습니다.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그림은 명확하게 현실을 표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벽은 그만큼 높았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노을처럼

그래도 터너는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그의 행동은 갈수록 기이해졌습니다. 사랑하는 단 한명의 가족이었던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더욱 사람과의 만남을 피했습니다. 말년에는 자신이 사는 곳도 주변에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가명을 쓰기도 했습니다.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던 1851년, 터너가 남긴 유언은 “태양은 신이다”였습니다. 마지막 말까지도 평생 ‘빛’에 천착했던 사람다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작품을 대거 국가에 기증했습니다. 언젠가는 누군가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였을 겁니다.


터너 그림의 진가를 알린 일등 공신은 19세기를 대표하는 미술 평론가인 존 러스킨입니다. 그는 터너의 작품에 대해 “그림을 뜻과 지식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되찾은 맹인처럼 순수한 시각으로 보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평가를 보고 한때 광고 문구로도 유명했던 헬렌 켈러의 명언이 떠올랐습니다.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리라.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

한번 상상해 볼까요. 평생 앞을 보지 못하다가 살다가 난생처음으로 눈을 떠 해가 떠오르고 지는 풍경을 보게 된다면. 그리고 3일 후 영원한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는, 세상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요? 명확한 형상이 잊히고 마침내 가슴에 남는 건, 모호하지만 가슴 벅차게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터너의 그림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색들 말입니다.


헬렌 켈러의 말은 이렇게 끝납니다. “단언컨대,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

빛과 색채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줘서, 본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주는 것. 터너의 그림이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실물과 이미지의 차이가 큽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직접 보시기를 권합니다.

즐거운 연휴입니다. 자연, 사랑하는 사람들, 그림, 영상…. 뭐든 좋으니,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i>*(참고자료) 이번 기사에 수록된 정보는 ‘J.M.W. Turner: Standing in the Sun: A Life of J.M.W. Turner’(Anthony Bailey 지음, TATE)와 ‘윌리엄 터너’(미하엘 보케뮐 지음, 권영진 옮김, 마로니에북스)를 중심으로 ‘터너&컨스터블’(정금희 지음, 재원) ‘터너’(양인옥 지음, 서문당)을 참조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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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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