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익 치익 치익….’ 규칙적인 소음이 압력밥솥에서 밥을 짓는 소리 같았다.
작년 여름 미국 동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시.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7층 건물 듀크퀀텀센터(DQC) 연구실에서 양자컴퓨터 개발기업 아이온큐(IONQ)의 김정상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만났다. 그가 두꺼운 차광막을 들췄다. 양자컴퓨터가 나왔다. 규칙적인 소음은 냉각펌프에서 나는 소리였다. 양자컴퓨터 중심부에 양자프로세서(QPU)가 있었다. 티타늄으로 제작된 은빛 QPU는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다. 냉각펌프는 QPU 온도를 영하 273도로 낮췄다. 양자를 잡아내기 위한 준비 단계다.
QPU 내부에 이터븀(Yb·원소기호 70번) 원자가 있다. 레이저를 QPU에 쐈다. 냉각된 이터븀에서 만들어진 아주 작은 당구공 모양의 양자 큐비트(Qbit) 21개가 잡혔다. 큐비트는 양자컴퓨터의 성능을 나타내는 단위이기도 하다. 각 큐비트 사이 거리는 3㎛(마이크로미터·1㎛=100만분의 1m). 전체 큐비트들을 일렬로 늘어뜨려도 머리카락 한 올 두께(약 100㎛)보다 얇았다. 레이저를 이용해 큐비트와 신호를 주고받았다.
양자기술 개발에 미국은 정파를 초월했다. 지난 10여 년간 김 CTO는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모두 만났다. 대통령들은 기업인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양자기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양자주도권법을 통과시켰다. 2018년부터 5년간 1조6000억원을 투입했다. 김 CTO는 “한국이 서둘러 양자컴퓨터 연구를 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기술 수준을 따라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진단한 한국 양자기술 수준은 선진국의 60% 수준에 불과했다. 정부가 기업과 손잡고 2035년까지 3조5000억원을 양자기술 분야에 투자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소식은 그래서 반가웠다. 양자기술을 미국의 90%까지 끌어올릴 것이라는 목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이던 작년 4월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과학기술교육분과 보고를 받고 양자기술에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떠올랐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는 양자기술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항공·우주, 인공지능(AI), 첨단바이오, 핵융합에 대한 투자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물론 모든 과학기술은 각각 중요하다. 다만 양자기술의 중요성을 반도체 산업 발전 측면에서 설명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작년 매출 300조원의 삼성전자가 1980년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덕분에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에 접어들었다. 반도체의 기본 원리는 전자의 이동으로 ‘0 또는 1’을 표현하는 것이다. 전기가 통하면 1이고, 전기가 통하지 않으면 0이다. 하지만 이는 한계에 달하고 있다. 반도체 공정이 미세해지면서 발생하는 이른바 ‘양자터널효과’ 현상 때문이다. 원래는 통과할 수 없게 설계된 반도체 내부 장벽을 전자가 이따금 뚫고 지나가는 현상이다. 전자의 흐름이 정밀하게 제어되지 않는 것이다.
작년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3㎚(나노미터·1㎚=1000분의 1㎛) 파운드리 양산에 들어갔다. 2027년에는 1.4㎚ 반도체 공정을 개발한다는 게 목표다. 과학계에서는 1㎚ 전후 선폭에서부터 양자터널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공정을 미세화하는 과정이 곧 한계에 봉착한다는 의미다. 선폭을 줄이는 방법 외에 반도체를 고도화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양자컴퓨터 개발이다. 양자컴퓨터와 양자센서, 양자통신은 ‘게임체인저’다. 금융·국방 암호체계를 무력화한다. 스텔스기를 탐지한다. 미세 암세포를 발견한다. 양자기술의 중요성에 대해서 풀려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 당시 이병철 삼성전자 창업회장의 글을 축약해 인용한다. 1986년 발간된 이 창업회장의 회고록 <호암자전> 중 일부다. “자원이 없는 한국이 살아남을 길은 첨단기술 개발밖에 없다. 반도체는 쌀과 같다. 백년대계를 위해서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다.”
앞으로 양자기술은 한국이 먹고살 쌀이자 밥이다. 양자컴퓨터를 구동하는 규칙적인 소음이 지금도 귓전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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