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좀처럼 잡히지 않는 물가상승률의 주범으로 기업들을 탓하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이른바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기업 탐욕에 의한 물가상승)에 관한 주장이다. 프랑스투자은행은 그리드플레이션 가능성을 지적하며 "건전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끝난 것인가"는 비판이 담긴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미국에서 작년 여름 시작된 그리드플레이션 논쟁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이는 대기업이 이익을 늘리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핑계 삼아 상품 가격을 필요 이상으로 올린다는 주장이다. 영국의 제3당인 자유민주당 의원들은 시장감독당국인 경쟁시장청(CMA)에 "유통기업들의 폭리 추구 행위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라"는 압력까지 가하고 있다.
영국의 3월 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10.1%에 달했다. 이 가운데 식음료 부문 같은 기간 19.2%나 급등했다. 빵, 시리얼, 귀리, 소시지 등 영국인들의 주식의 가격 폭등세가 전체 인플레이션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는 분석이 잇따랐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지난 11일 통화정책회의까지 12차례 연속으로 기준 금리를 올렸는데(현재 연 4.5%), 앤드류 베일리 총재는 "기업들이 가격 인하에 나설 필요가 있다"며 그리드플레이션에 관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최근 한 영국 소비자단체가 8개 식료품업체들을 대상으로 2만6000개 품목의 1년새 가격 변동 추이를 전수 조사한 결과 25.2% 이상 가격을 올린 대형마트(리들·Lidl)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영국 슈퍼마켓 체인점 아스다에서는 180g짜리 숙성 체다치즈 1팩이 1파운드에서최근 1.8파운드로 인상됐다. 가격이 1년만에 80%나 뛰어오른 것이다.
그리드플레이션 주장은 과도하다는 반론도 나온다. 컨설팅 기업 옥스퍼드이코노믹스의 마이클 손더스 수석 경제고문은 "전 세계적으로 그리드플레이션 논란이 불붙고 있지만, 영국이 처한 상황은 이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는 "에너지 기업이나 금융사들의 이익률이 크게 상승한 것은 맞지만, 이를 제외한 기업들의 이익률은 오히려 지난해 3분기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며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로는 25년새 최저치로 떨어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작년까지 6년간 영란은행 통화정책회의 위원을 역임했다.
앞서 폴 도노반 UBS 이코노미스트도 "기업들이 소비자들에게 높은 가격을 전가하고, 지금의 고물가 상황을 자신들의 마진을 높이는 데 활용했다"고 지적했다. 좌파 성향의 버니 샌더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경제위기는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기업들의 탐욕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드플레이션 논쟁에 가장 먼저 불을 붙인 건 뉴욕타임스(NYT)였다.
지난해 6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엑슨모빌 등 미국 에너지 기업들이 전쟁 이후 에너지 대란으로 거둬들인 이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많다"며 "이들에게 '횡재세(초과이익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바 있다. 이후 NYT는 그리드플레이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찬성 측과 반대 측의 입장을 전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