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실리콘밸리 등 미국 서부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 등을 만나 미래 사업 관련 협업 방안을 논의했다. 산업계에선 이 회장의 이번 미국 장기 출장이 삼성의 미래 전략을 구체화하고 ‘뉴 삼성’ 비전의 기틀을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본지 4월 21일자 A1, 11면 참조12일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미국 출장을 마치고 이날 귀국했다. 미국 체류 기간은 총 22일로, 이 회장이 2014년 경영 전면에 나선 이후 가장 길다.
이 회장은 미국 출장 기간에 동부의 바이오 클러스터와 서부 실리콘밸리 정보통신기술(ICT) 클러스터(산업단지)를 횡단하며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존슨앤드존슨 BMS 바이오젠 오가논 플래그십파이어니어링 등 20여 개 글로벌 기업의 CEO들을 만났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번 출장 기간 이 회장은 매일 한 명 이상의 ‘빅샷’을 만나는 강행군을 이어갔다”며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단절된 글로벌 네트워크를 복원했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인공지능(AI), 자동차 전장용 반도체, 차세대 통신, 바이오 등 삼성의 ‘미래 성장 사업’으로 점찍고 육성하는 분야의 글로벌 CEO를 주로 접촉했다. 중장기 비전을 공유하고, 미래 산업을 선도하기 위한 협력 방안을 함께 모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주목되는 건 이 회장과 젠슨 황 CEO와의 만남이다. 지난 10일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 일식집에서 만난 두 기업인은 AI 반도체 관련 시너지 창출 방안과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협업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엔비디아는 생성형 AI 서버에 들어가는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생산하고 있다. 칩 생산 때는 삼성전자 같은 파운드리업체를 활용한다. 이 밖에 삼성전자의 고대역 D램(HBM) 추가 공급 여부도 주목할 만한 포인트로 꼽힌다.
이 회장은 AI 분야 석학들과의 교류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글로벌 AI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과 만나 다양한 사업 영역에서 AI 활용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삼성전자와의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삼성 안팎에선 ‘미래 준비 경영’ 행보에 나선 이 회장이 AI 등 성장 사업에 맞춰 삼성의 조직 문화를 ‘대수술’하는 작업에 들어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 회장이 규모가 급속히 커지면서 경직된 조직을 첨단산업 트렌드에 걸맞게 유연하게 바꾸고 정체된 삼성의 혁신 DNA를 되살리는 경영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 취임 직후 “인재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조직문화, 도전과 열정이 넘치는 창의적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계에선 이 회장이 삼성의 미래 전략을 구체화하고 ‘뉴 삼성’ 비전을 가다듬는 미국 출장이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AI, 바이오, 전장용 반도체와 차세대 이동통신은 미국 기업이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며 “미국과의 비즈니스 네트워크가 사업의 존폐를 가름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삼성은 글로벌 ICT 시장의 불황 속 새로운 먹거리를 길러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며 “이 회장이 직접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동해 신사업 전략을 모색하며 돌파구를 찾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