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커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이 지난달 26일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중 워싱턴의 한국 프레스센터를 찾아 별도로 사전 브리핑을 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커비 조정관은 다음 날 열릴 정상 회담의 핵심인 상설 ‘핵협의그룹(NCG)’ 창설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확장 억제 의지를 집중 설명했다.
한국이 북한의 공격을 받으면 미국 수준으로 방어해 준다는 확장 억제(핵우산)는 한·미 정상 회담을 계기로 몇단계 업그레이드됐다. 확장 억제 의지를 담은 ‘워싱턴 선언’을 별도 문서로까지 내놓은 것은 대북 방어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미국이 최상의 핵우산을 제공하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도 핵우산에 대해 별도 문건을 발표하지 않았다. 일본과도 마찬가지다.
핵심인 NCG는 핵 기획·운용·실행에서 한국과 협의하는 보다 차원 높은 통로가 된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핵 전력 운용 계획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한국이 따라가는 형식이어서 한계가 뚜렷했다. NCG가 가동되면 한국의 발언권이 높아 상시 배치에 준하는 미국 전략 자산의 한반도 전개가 가능해진다.
NATO 핵기획그룹 본떠…자체 핵 역량 족쇄 채워
NCG는 NATO의 핵기획그룹(NPG)을 본떴다. NPG는 미국과 NATO 회원국들이 핵 운용 계획을 공유하고 논의하는 것이다. NCG도 이와 비슷하게 운용될 것으로 보이지만 두 협의체의 공통점은 최종 핵 사용 결정권은 미국 대통령이 가진다는 것이다. NCG와 NPG의 차이점은 전술핵 배치 여부다. NATO 회원국 중 5개국에는 미군 전술핵이 배치돼 있다. 한국에는 앞으로도 배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상 회담에서 못 박았다.
NATO는 회원국 전투기들이 모의 전술 핵폭탄을 실제로 장착하고 훈련하는 반면 한·미는 도상 훈련만 추진하고 있다. 그럼에도 NCG의 의미는 작지 않다. 30여 개국으로 이뤄진 NATO 핵 공유 체제와 달리 이번 워싱턴 선언은 한·미 일대일 약속이란 점에서 미국의 북핵 저지 의지를 읽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런 의지를 “동맹, 파트너에 대한 북한의 핵공격은 정권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핵무기 탑재 탄도 미사일로 무장한 미국 전략 잠수함(SSBN) 등 미국 전략 자산의 한반도 전개가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김정은에 대한 직접적인 경고장이다. 윤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펜타곤 미국 국방부를 방문해 미군 수뇌부에게 직접 정세 브리핑을 받은 것도 한국 방어를 위한 미국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양국이 협력 범위를 사이버·우주로 넓힌 것도 북한 미사일 대응을 위한 한국형 3축 체계를 강화하는 데 긴요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질적인 확대로 볼 수 있다.
미국이 확장 억제에 대해 역대 정상 회담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은 한국 내 일고 있는 자체 핵무장 또는 미군 전술핵 재배치 주장을 의식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 핵·미사일에 대한 한국민의 우려를 충분히 알고 있고 미국의 전략 자산을 총동원해 막아줄 테니 안심하라는 메시지다. 만약 한국이 자체 핵무장에 나서게 된다면 일본과 대만 등으로 핵개발 도미노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미국으로선 부담이다. 결국 이번 정상 회담을 통해 NCG 창설 및 확장 억제 강화라는 미국의 방침과 전술핵 한반도 재배치 및 한국의 자체 핵무장을 맞바꾼 셈이 됐다.
한·미는 핵확산금지조약(NPT) 의무 및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준수를 재확인하면서 한국 자체의 핵 역량 확대에 족쇄를 채워 버린 것은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확장 억제를 문서화했다고 해서 한국 안보의 종착역으로 볼 수도 없다. 더욱이 북한은 미국의 막강한 전략 무기들을 더 이상 겁내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겨냥해 미사일과 핵어뢰를 시험 발사하고 있다. 한·미 방어망으로 대처하기 쉽지 않은 신무기들도 속속 선보이고 있어 안보 불확실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
한·미 간 합의의 지속성도 관건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한·미 연합 훈련을 전격 없애 버린 데서 잘 알 수 있듯이 미국의 정권과 전략적 판단에 따라 한반도 안보 정책이 가변적일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이 국제 안보 상황에 따라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후순위로 밀릴 수 있다. 북한은 그 틈을 파고들 것이다.
미국이 확장 억제에 대한 강도 높은 약속을 했지만 미국이 본토 위험을 무릅쓰고 핵전력을 사용하겠느냐는 의문도 여전하다. 이 때문에 한·미가 확장 억제력을 높이려는 노력을 지속하더라도 한국의 독자적인 북핵 대응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미 정상 회담에서도 확인됐듯이 국민 다수가 찬성하는 핵무기 독자 개발은 미국의 반대와 국제 제재 때문에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여차하면 핵을 단기간에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제 제재도 피할 수 있다. 윤 대통령도 올해 1월 “북핵 문제가 더 심각해져 대한민국에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우리 자신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며 “일본은 6개월이면 (핵개발이)된다고 하고…”라고 여운을 남긴 바 있다. 이어 지난달 28일 방미 마지막 일정으로 미국 하버드대 학생들과 만나선 “한국은 핵무장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이른 시일 내에, 심지어는 1년 이내에도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기술 기반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핵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만이 아니고 핵무기와 관련된 복잡한 정치·경제학과 정치·경제 방정식이 있다”며 “워싱턴 선언에 우리의 의무가 (들어가) 있다”고 했다. 독자 핵 개발을 하지 않고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日, 핵연료 재처리 허용 받아 반년이면 핵무장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도 6개월이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쉽지 않다. 핵무기는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얻는 플루토늄 또는 95% 이상 농축된 우라늄을 활용해 만든다. 재처리 기술은 어느정도 갖고 있지만 재처리 시설은 없다.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플루토늄과 고농축 우라늄도 없고 농축과 핵 기폭 장치 기술력도 약하다.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양국은 2015년 협정을 개정했지만 재처리는 인정받지 못했고 핵무기 전용이 불가능한 건식 재처리 방식(파이로프로세싱) 공동 연구와 20% 미만의 우라늄 농축만 할 수 있도록 허용 받았다. 그나마 이 모든 과정도 미국 측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반면 일본은 NPT를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단기간에 핵무기 제조 능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미국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과 원자력 협정 개정으로 핵연료 재처리를 허용하는 포괄적 사전 동의를 얻음에 따라 핵무기로 전용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확보했고 우라늄 농축 권한도 가지게 됐다.
일본은 현재 6000기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 47톤을 갖고 있다. 여차하면 6개월 내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확보한 것이다. 한국도 적어도 이런 수준의 핵 잠재력을 확보하기 위한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심각한 사용 후 핵연료 저장 문제를 위해서도, 원자력 추진 잠수함용 핵연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영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