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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 석부작 한 점과 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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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병장 때다. 내무반에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잡지를 읽고 있었다. 주임원사는 군기 빠진 군인을 찾아내는 데 선수였다. 귓불을 잡혀 끌려 나갔다. 굴러다니던 군용 더플백을 메고 부대 뒷산을 올랐다. 주임원사는 계곡에서 손바닥만 한 수석(壽石)을 골라 집었다. 가방 한가득 돌을 담아 부대로 돌아왔다. 그날 연병장 한편에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난초 모종을 받았다. 연둣빛 소엽 풍란은 한 촉이 손가락만 했다. 계곡에서 가져온 수석에 난초 모종을 붙였다. 노끈으로 줄기를 돌에 묶었다. 이끼로 뿌리를 살짝 덮어 마무리했다. 이후 ‘난초관리병’이 돼 아침저녁으로 흠뻑 물을 줬다. 하룻밤 지나면 연약한 뿌리는 간신히 1㎜ 뻗어나갔다.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난을 키우는 것을 ‘석부작(石附作)’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주임원사는 군대를 제대하는 청년에게 석부작을 한 점씩 선물했다. 20대 청년의 눈에는 고리타분해 보였다. 집에 둘 곳도 마땅찮아 거추장스럽기까지 했다.

사회생활을 한 지 10년여가 돼 가는 지금에서야 석부작이 눈에 밟힌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만원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때 더욱 생각난다. 우리 모습 같아서다. 바쁘게 하루를 보낸다. 이따금 점심을 거르기도 한다. 목덜미는 뻐근하다. 오랜 시간 뚫어져라 모니터를 본다. 눈은 침침해진다. 피곤한 다리를 끌고 집에 간다. 가끔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해본다. 주임원사의 석부작은 청년들이 사회에 어떻게든 뿌리 내려 잘 살아 보라는 격려 아니었을까.


근로시간 개편이 ‘주 69시간 논란’으로 번진 지 제법 시일이 지났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많은 소득을 위해 일을 더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감이 몰리면 단기에 집중해야 할 때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일은 생계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는 일을 통해 자신의 소질과 능력을 계발하고 자아실현을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인 업무에 열성적인 사람일수록 그렇다. 그중에 상당수가 한층 고양된 업무처리 솜씨와 문제해결 능력을 갖게 된다. 양적인 노력이 쌓이면 어느 순간 질적인 도약이 이뤄지는 것이다. 동양 고전에선 우공이산(愚公移山) 마부작침(磨斧作針)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고 했다. 현대 서양 출판계에선 ‘1만 시간의 법칙’과 ‘그릿’(GRIT·투지 끈기 등)이 인기를 끌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선 일정량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얘기다.

일종의 ‘양질 전환 법칙’을 간접 경험하는 사례도 많다. 피겨스케이터 김연아 선수도 그렇다. 매일 새벽 연습할 때 무슨 생각을 하냐는 질문에 그는 답했다.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 그렇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우리는 모두 그냥 한다. 팀에 이름을 걸고 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발표용 장표를 만든다. 재판일이 잡힌 변호사는 서면을 쓴다. 회계사는 정기감사를 위해 계산기를 두드린다. 공장 직원은 납품 물량에 맞춰 설비를 돌린다. 마감을 앞둔 기자는 기계적으로 지면을 채운다. 1주일 넘게 걸려 꾹 채운 10장짜리 글에 빨간펜이 그어지면 두 번째 글을 쓴다. 그래도 안 되면 다시 다음 글을 쓴다. 그렇게 모두 작은 뿌리 1㎜를 뻗는다.

누군가는 말한다. 아등바등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하지 않냐고. 산업화 시대 기성세대의 논리 아니냐고. 당연히 퇴근 시간 친구들과 생맥주 한 잔 기울이고 싶다. 꽃이 피면 사랑하는 사람과 훌쩍 떠나고 싶다. 마음 한쪽에 그런 아쉬움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동시에 지금의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도 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날을 위해, 어제보다 더 발전된 나 자신을 위해 묵묵히 노력해간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조금씩 뿌리를 뻗고, 천천히 줄기를 올려, 언젠가 피울 꽃을 기다린다.

난초 화분을 가득 실은 화물차는 종종 서울 광화문과 여의도 빌딩 숲을 누빈다.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이 가득한 테헤란로와 판교까지 이어진다. 화물차 안에는 승진을 축하하는 난도 있고, 창업과 펀드 투자 유치로 새 출발을 응원하는 난도 섞여 있다. 퇴임을 기념하는 난도 있다. 청춘의 결의를 담은 용기 있는 출발이나 큰 허물 없이 긴 여정을 마친 것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세상에 뿌리를 뻗어가며 살아가는 모두에게 마음을 담아 작은 석부작 한 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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