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4년 7월, 서울 청계천 근처 천일백화점 안에 상업화랑이 들어섰다. 이름은 '천일화랑'. 당시 천일제약의 디자이너로 일하던 이완석(1915~1969)이 세운 '국내 최초의 상업 갤러리'였다.
전후 혼란 탓에 천일화랑은 고작 6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국내 미술계에 두 가지 큰 의미를 남겼다. 하나는 국내에도 서구처럼 상업 갤러리가 생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다는 것, 다른 하나는 전쟁 중 세상을 떠난 작가(김중현 구본웅 이인성)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3인 유고전'을 열었다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냈던 고(故) 이경성 미술평론가가 "화단적 의미가 큰 전시"라고 말했던, 바로 그 전시다.
국내 최초 상업 갤러리인 천일화랑의 역사가 서울 신사동에서 되살아났다. 예화랑이 설립 45주년 기념으로 준비한 전시 '밤하늘의 별이 되어'를 통해서다. 예화랑은 천일화랑의 역사를 이어받은 곳이다. 현재 예화랑을 운영하고 있는 김방은 대표가 이완석의 외손녀다. 이완석의 딸 이숙영 씨가 1978년 예화랑을 열었고, 2010년 그가 별세한 이후부터는 딸인 김 대표가 화랑을 운영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김 대표가 2년 넘게 직접 준비해왔다. 김 대표는 "2년 전 여름, 충남문화재단으로부터 흑백 포스터 이미지를 그린 작가가 외할아버지인 이완석이 맞냐는 전화를 받은 후 처음으로 제대로 외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게 됐다"며 "그러면서 외할아버지가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것을 깨닫고 천일화랑과 그 때 전시됐던 작가들을 조명하는 전시를 열기로 했다"고 말했다.
전시장 1층에 구본웅과 이인성의 작품을 배치한 건 그래서다. 천일화랑이 1954년 9월 열었던 '3인 유고전'의 주인공들이다. '한국 야수파의 거장' 구본웅이 섬세하게 그린 데셍, '한국의 고갱'으로 불리는 이인성의 서정적인 수채화를 볼 수 있다. 아쉽게도 김중현의 작품은 유족들의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없어 이번 전시에는 소개되지 못했다.
둘뿐만이 아니다. 2층에는 김환기 유영국 천경자 문신 등 이완석과 인연을 맺었던 작가들의 작품이 빼곡히 걸려있다. 한 명 한 명이 미술 교과서에 등장할 만한 굵직한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들이다.
"한국을 그렸더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 그렸더니 한국"(오지호·1905~1982),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일, 사물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일깨워주는 일이다"(임직순·1921~1996) 등 예술가들이 남긴 말을 통해 그들과 대화하듯 전시를 즐길 수 있다.
전시는 5월 4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