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 21일 08:07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돈을 함부로 쓸까봐 은행 예금 OTP(일회용비밀번호)를 가지고 있습니다.”(한 벤처캐피탈사 대표)
벤처캐피탈(VC) 업계가 흉흉하다. 일부 스타트업 대표의 방만한 경영으로 기업 존립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곳곳에서 터지면서 VC들이 사후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다. 투자 단계에서도 과거보다 기업 현황과 경영자 검증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충격의 그린랩스 적자
지난달 싱가포르 모처에서 열린 해외 자금출자자(LP) 모임의 화두는 농업 플랫폼 그린랩스였다. 그린랩스는 국내 애그테크 기업 가운데 최초로 기업가치 8000억원을 기록하면서 농업계의 유니콘으로 불린 기업이다. 하지만 작년 말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농산물을 거래하고 내부 횡령 의혹까지 벌어지면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다.19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그린랩스는 지난해 매출 2807억원을 거두면서 영업손실 1019억원을 냈다. 외부 감사인은 “계속기업이 불확실하다”고 평가했다. 유동부채가 유동자산보다 크다는 이유다.
농가로부터 받지 못한 그린랩스의 채권 미수금도 190억원에 달했다. 2021년 530억원에서 지난해 2590억원으로 과도하게 농산물 매출을 늘렸다가 받지 못한 미수금이 늘어난 것이다. 미수금의 주체가 영세 농가와 유통사인 만큼 채권 회수가 어려울 것으로 회사 측은 보고 있다. 그린랩스는 농가별로 설계·관리한 ‘스파트팜’ 건설 분야에서도 투자한 금액 22억원 중 21억원을 손실 처리했다.
고강도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다. 전체 직원의 90%를 정리해고했다. 대표 두 명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주식을 삭감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최성우 대표의 주식은 19.56%(4만8917주)에서 16.96%를 감자해 2.6%(4891주)로 줄어들었고, 안동현 대표는 7.13%(1만7849주)의 지분을 전액을 감자했다. 그린랩스 관계자는 “사업을 재정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VC업계 투자 '신중에 신중'
잘 나가던 플랫폼 기업들의 대규모 적자가 계속되자 VC업계의 투자 관행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발란과 왓챠 등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유니콘기업조차 순식간에 위기에 몰리는 일이 반복되면서다. 그동안 VC들은 막대한 금액을 한 기업에 투자하는 방법보다 5억~10억원의 소규모 금액을 수십 개 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10개 스타트업에 씨를 뿌린 뒤 이들 중 한 곳에서 '대박'을 기대한다. 한 곳에서 10배 수익을 거두면 다른 기업에서의 손실을 만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기업에 투자한 만큼 포트폴리오 회사들의 자본상태나 경영자의 역량을 파악하기 어려운 구조다. 회사 운영에 대해서는 창업자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점도 VC업계의 불문율로 통한다.
VC들은 이번 대규모 적자를 계기로 심사 과정을 늘려 스타트업의 역량을 수차례 검증하고 있다. 한 VC 대표는 “6개월 동안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스타트업 경영진을 만나고 있다”며 “창업자들을 만나 기업의 역량을 파악하고 경영진의 됨됨이를 시간을 두고 파악하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투자금이 들어있는 에금계좌의 OTP를 가지고 있다가 스타트업의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요청할 때마다 필요자금을 주는 방법도 있다.
당분간 스타트업 투자에 대한 보수적인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신아 카카오벤처스 대표는 지난 18일 벤처캐피탈협회가 개최한 패널 토론에서 “‘스타트업들은 내년 상반기 펀딩까지 살아남자’는 생존 전략을 펼치고 있다”며 “카카오도 올해 신규로 투자가 들어간 곳이 없을 정도로 투자금이 줄어들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1분기 벤처투자금액은 8800억원으로 작년 동기 대비 60% 감소했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