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는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와 함께 미술계에서 최고로 쳐주는 자리다. 서용선 작가(72)는 남들은 못 해서 안달이라는 ‘선망의 자리’를 2008년 미련 없이 박차고 나왔다. 정년이 10년이나 남은 때였다.
이유는 딱 하나. 그림만 그려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후학 양성도 중요한 일이지만 교수는 일정한 생활을 강요받는다. 무아지경에 빠져 그림을 그리다가도 시간이 되면 수업을 나가야 한다. 서 작가는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고 그래서 사표를 냈다.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그 길로 비행기를 탔다. 미국 뉴욕, 독일 베를린, 호주 멜버른 등 대륙을 가로지르며 움직였다. 원하는 도시에 도착하면 짐을 풀기도 전에 마치 ‘전쟁물자’ 챙기듯 붓과 물감, 캔버스를 샀다. 그리곤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씩 머물며 그곳의 일상을 캔버스에 담았다. 지하철, 카페, 길거리 등 대도시 속 사람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닥치는 대로 그렸다.
서울 청담동 장디자인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서 작가의 개인전 ‘아이 씨 유(I SEE YOU)’는 그 결과물이다. 2008년부터 15년간 서 작가가 전 세계 대도시를 다니며 그린 도시 연작 17점을 모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서 작가 특유의 강렬한 색채와 거침없는 붓 터치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가장 눈길을 잡아끄는 건 사람들의 얼굴이다. 인종, 성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붉은색이고 얼굴이 뭉개져 표정도 잘 보이지 않는다.
서 작가는 ‘숨겨진 현대인의 욕망’을 드러내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은 나름의 욕망과 열망을 갖고 있잖아요. 하지만 각박한 대도시 속에서 그런 욕망을 온전히 드러내기는 힘들죠. 욕망을 숨긴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외로운 삶과 실존적 고민을 붉은색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일상에서 그냥 지나칠 법한 사람들이 사실은 모두 욕망을 갖고 사는 현대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호기심이 생긴다. 뉴욕 맨해튼 지하철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여성은 어떤 전쟁 같은 하루를 보냈을까(브루클린 4·2023). 멜버른 트램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남녀는 무슨 관계일까(멜본트램·2013, 2015).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건 관람객의 몫이다.
도시마다 다른 색채와 분위기를 감상하는 것도 묘미다. 지하철이 주 배경인 뉴욕 그림은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회색빛이 도드라진다. 베를린 알테나치오날갤러리 앞에서 연주하고 있는 악사들을 그린 ‘미떼(Mitte) 다리 연주자들’(2012, 2015)은 푸른 녹음 덕분에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전시는 4월 22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