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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 가면…36년 대한민국 현대사가 담긴 커피 한 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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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 가면…36년 대한민국 현대사가 담긴 커피 한 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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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가로로 길쭉하게 뻗은 대학로 횡단보도만큼 학림다방의 유리창은 넓다. 학림다방을 맡게 된 36년 전부터 이충렬 대표는 종종 그 창가에 앉아 대학로 거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겨울의 새하얀 설경부터 강렬하게 내리쬐는 여름의 볕까지. 최루탄이 터진 긴박한 민주화 운동의 한 순간부터, 누군가를 추모하거나 무엇인가를 쟁취하기 위해 거리를 따라 행진하는 군중의 모습까지.

때로는 신촌에서 대학로로 자리를 옮긴 ‘연우무대’와 1991년 개관한 ‘학전 소극장’에서 예술가들의 모습을 담기도 했다. 이충렬의 사진집 <학림다방 30년>에는 그 오랜 시간 지긋하게 다방을 지켜온 그의 역사가, 한국 현대사의 어떤 장면이 성실하게 담겨있다.

1983년 당시의 학림지기가 다방을 팔고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사람들은 ‘학림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턴테이블에 신청곡이 담긴 LP를 올리고 대학생과 예술인이 모여 열띤 토론을 나누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유선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가요와 나팔바지를 입은 웨이터가 세월의 흔적을 지웠기 때문이다. 1987년부터 학림지기를 맡은 이충렬 대표는 단골들의 이야기와 오래된 사진을 참고해 예전의 학림을 되찾기 시작했다. 옛날의 그 학림과 다르게 변화를 준 건 커피였다. 드물게 유럽 생활을 경험한 단골들이 종종 “커피가 아쉽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학림에서는 이충렬 대표가 직접 볶은 ‘학림 블렌드’로 커피를 대접하기 시작했다.

단행본 작업을 위한 취재로 인연이 닿아 학림을 찾을 때면 종종 이충렬 대표와 대화를 나눴다. 갓 대학을 졸업한 애송이 칼럼니스트였지만, 그는 학림을 오래 찾은 단골과 다름없이 맥주를 건넸다. 나는 학림에서 커피를 볶기 시작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의 커피 시장에 대한 얄팍한 이야기를 건네며 맥주값을 대신했다. 드라마 촬영지로 소문난 매장은 왕왕 북적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뒷골목에 위치한 로스팅 공간으로 데려갔다. 개량 한옥 형태의 낮은 단층 건물로 한때 제면소를 겸한 식당이었던 공간을 인수해 작업실로 바꾼 곳. 그곳에서 나는 이충렬 대표가 경험한 30년의 커피 역사를 들었고, 손님들의 신청곡을 감당하기 위해 혹은 당신의 취향을 위해 모아둔 오래된 레코드를 감상했다.

그곳에는 로스터기 외에도 에스프레소 머신이나 그라인더 같은 오래된 커피 기구들이 있었다. 이충렬 대표가 매장 영업을 위해, 혹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직접 수집한 것이다. 88서울올림픽 즈음에는 외국인을 맞이하기 위해 호텔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남과 동시에 그 머신들은 쓸모를 잃었는데,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에스프레소 문화가 좀처럼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골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서 로스터기를 구입하기까지 한 이충렬 대표에게 그 머신은 보물과 같았다. 30년 전에는 커피를 직접 볶아 내어주는 곳이 드물었고 에스프레소 머신을 다룰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갖고 돌본 덕분에 기계들은 세월의 흔적에 비해 아직도 근사한 성능을 자랑했다.

지금의 ‘학림커피’는 로스터리로 사용하던, 오래된 커피 기구가 있던 공간을 카페로 바꾼 곳이다. 단층 건물이지만 서까래가 보이는 삿갓 형태의 연등 천장을 둬 층고가 높고 쾌적하다. 카페가 되기 전 두서없이 놓여있던 기계들은 제면기가 있던 주방으로 들어가 제 위치를 찾았다. 오래된 기계들과 역할을 나눌 몇 개의 최신식 기계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 외의 공간은 그간 이충렬 대표가 수집한 커피용품과 학림의 커피로 소박하게 채워져 있다. 70년 가까운 역사의 학림다방에 시절의 흔적이 가득하다면, 학림커피에는 30년 넘게 홀로 학림을 지켜온 학림지기 이충렬의 역사가 있다. 학림다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래된 목제 인테리어에서 풍겨오는 세월의 아우라가 있고, 학림커피에는 수십 년간 성실하게 공간을 지켜온 어떤 장인의 고매한 정신이 있다.

학림의 절반이 넘는 역사를 책임진 ‘학림 블렌드’는 우리 입맛을 잘 담아낸 단단한 커피다. 사뭇 다른 두 공간에서 똑같은 커피를 마시고 나면 비로소 커피가 지닌 힘을 느낄 수 있다. 공간의 힘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세월의 무게를 커피가 함께 지탱하고 있음을 말이다.

조원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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