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일은 ‘국제 여성의날’이다. 1908년 3월 8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 데서 유래했다. 빵과 장미는 각각 생존권과 참정권을 의미했다.
매년 이맘때면 서점에선 여성의날 기획전이 열린다. 여성이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워온 역사를 기리기 위해서다. 주로 여성 작가가 쓴 고전, 젠더 관련 책을 추천한다. 대부분 해외 도서로 채워진 목록을 보다 보면 ‘한국의 여성 고전은 어떤 작품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여성 영웅이 활약하는 <박씨전> <홍계월전> 정도가 먼저 떠오른다.
여성 영웅소설 <방한림전>도 있다. 19세기 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유명한 편도 아니고, 작자도 미상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읽혔다고?’ 싶은 파격적 내용이다. 지금 드라마로 만들어도 화제작이 될 만하다.
주인공은 ‘방관주’. 그는 명나라 북경 유화촌에서 어느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조선에서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많았다.
방관주는 어려서부터 행동이 늠름하고 글재주가 뛰어났다. 부모가 일찍 죽자 가문을 지키기 위해 남자 행세를 하고 과거를 치러 장원급제를 한다.
여러 재상이 그를 사위 삼으려고 탐낸다. 병부상서 서평후의 막내딸 ‘영혜빙’도 방관주와 맞선을 봤다.
영혜빙은 상대방이 여자인 걸 첫눈에 알아차린다. 그러고도 결혼을 감행한다. 평소 ‘남편의 통제하에 사느니 평생 혼자 살겠다’고 생각해서다. 방관주라면 평생지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두 사람은 잉꼬부부로 지냈고, 방관주는 오랑캐를 무찌르는 공도 세운다. 그는 죽기 전 왕에게 진실을 고백하는데, 왕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도록 한다.
남자보다 능력이 뛰어난 여자, 남장, 동성혼…. 당시로서는 파격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여성 영웅소설 중에도 남장을 하고 벼슬에 나아가는 얘기가 있었지만 대부분 주인공은 가정으로 복귀해 참한 아내의 삶을 산다.
<방한림전>을 현대 한국어로 풀이한 이상구 전 한국고소설학회장은 “여성 영웅소설은 기본적으로 여성들의 사회적 성취와 양성 평등을 향한 욕망을 드러낸 작품”이라며 “<방한림전>은 가부장적 사회 체제의 질곡을 가장 심각하면서도 급진적으로 문제 삼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남장은 오늘날 사극 드라마에서도 자주 활용하는 장치다. ‘청춘월담’ ‘연모’ ‘성균관 스캔들’ 등에서 여자 주인공은 조선시대 여성에게 가해지던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으려고 남장을 택한다.
이런 이야기가 여전히 공감을 얻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세상의 편견이나 모순과 맞서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장미는 무엇일까. <방한림전>이 던지는 질문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