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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가는 대출에 그리 많은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실적도, 자산도 부족한 것이 초기 스타트업이기 때문입니다. 은행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다가 '차라리 투자 유치를 위해 더 뛰겠다'며 벤처캐피털(VC)을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최근엔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신규 투자가 막힌 VC가 공공기관의 보증 대출 프로그램과 연계하기 시작하면서, 단기 운전자금을 찾는 창업가 수요가 몰리고 있습니다. 보증 대출 프로그램의 확대 기조와 이면의 스타트업·VC·정책금융기관 3자 이해관계 변화를 한경 긱스(Geeks)가 살펴봤습니다.
#. 패션 스타트업 쉐어그라운드는 2019년 설립됐다. 동대문 의류 사업자와 중간 상인인 ‘사입삼촌’을 대상으로 매입관리 솔루션을 공급해 규모를 키웠다. 2021년 4월 30억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 유치를 받았지만, 최근 개발자 인건비가 오르며 자금 소모가 빨라졌다. 신규 투자 유치가 어려워졌지만, 쉐어그라운드는 기대하지 않던 기금 보증대출 프로그램에서 약 20억원을 받을 수 있었다. 투자사인 TBT가 일종의 보증인 역할을 하면서다. 송무현 쉐어그라운드 이사는 “경영지원팀 내부에서도 자산이 없어 대출을 포기해야 한다는 시각이 강했는데 선입견이 달라지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VC와 함께 각종 기금의 보증 대출 프로그램을 찾는 스타트업이 많아지고 있다. 이른바 ‘뎃 파이낸싱(Debt Financing)’ 방식이다. 금리 상승으로 인해 운전자금이 말라가는 가운데 ‘투자 혹한기’가 이어지며 투자사가 지분을 받고 자본을 대주는 기존의 자금 유치 방식은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VC들이 투자 포트폴리오를 살리기 위해 보증인을 자처하면서, 담보로 제출할 자산이 없어 빚을 내지 못하던 초기 스타트업도 자본 조달 방식을 바꿔나가는 추세다.
경기 위축에 VC-보증기금 '공생' 인기
기술보증기금에 따르면 지난해 기보의 ‘VC투자매칭 특별보증’ 대출형 프로그램 지원 총액은 1709억원으로 집계됐다. 직전 연도(806억원)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같은 기간 승인 기업은 49개에서 62개 업체로 늘었다. 해당 프로그램은 6개월 이내 20억원 이상 투자를 유치한 스타트업 중 VC들이 추천하는 업체 일부를 선발해 기보 명의의 보증서를 끊어준다. 창업가는 이를 토대로 다른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 2020년 시행 첫해엔 지원 총액이 384억원, 선발 업체 24개 상당의 프로그램이었지만 신청이 몰리며 규모가 커진 것이다.중소벤처기업부 산하 기관인 기보는 스타트업 업계에 자본 공급을 유도하는 주요 공공기관 중 하나다. 벤처투자 연계보증, 예비유니콘 특별보증 등 대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푼이라도 절실한 스타트업에 이들 프로그램은 단비 역할을 했지만, 일각에선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창업 9년 차에 접어든 중견 스타트업의 한 임원은 “대출이 가장 필요할 때는 사실 투자 라운드 기준 시리즈A 이하 초기 스타트업 시절”이라며 “대부분 대출 지원 프로그램은 실제론 5억원 받기도 힘들다”고 귀띔했다. 초기 창업가 입장에선 통과 확률이 ‘바늘구멍’이란 점도 어려움을 더했다.
다만 VC들이 스타트업들 신용도 보강에 나서며 상황이 달라졌다. 최근 VC의 신규 투자는 뚜렷한 감소 추세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VC는 6조7000억원의 투자를 집행해 전년 대비 규모가 12% 줄었다. 새롭게 투자를 집행하기보다는 기존 포트폴리오를 살리는 것으로 방향을 재정립해야 했다. VC투자매칭 특별보증은 VC 68개사가 기보의 파트너가 되는 구조다. TBT 이외에도 미래에셋벤처투자, 캡스톤파트너스, 포스코기술투자 등 굵직한 VC들이 소속돼 있다. VC들이 대출 프로그램에 관여하며 평균 대출 수령액은 20억원 이상으로 늘었다.
공공기관 입장에서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통상 은행에서는 초기 스타트업에 돈을 빌려주기를 꺼린다. 신용이든 자산이든 담보 거리가 없어서다. 3년 차 스타트업 A사는 최근 은행 대출 상담을 받았다가 재무제표상 당기순손실을 지적받았다. “업력이 짧고, 사업 초기 발생한 손실을 대입하면 최대 대출 한도가 5000만원이거나 대출 자체가 어렵다는 안내를 받았다”며 “설사 대출이 가능하더라도 이익 규모에 따른 대출 한도가 낮게 책정돼 필요한 자금을 받기 어렵다”고 했다.
정책자금 지원 성격을 지닌 공공기관이라 하더라도, 초기 스타트업을 상대하는 위험성은 은행과 다르지 않다. 기보 대출 프로그램은 2020년 정부의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출범했지만, VC가 투자하고 추천한 기업에 지원하는 만큼 내부에서도 최근 시장 상황에 적합하다는 판단이 나온다. 기보 관계자는 “대출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대부분 스타트업은 적자 업체”라며 “보증기관 입장에선 리스크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VC와 기보 양측이 평가한 스타트업을 선정하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고 말했다.
대출 활성화 시발점 '투자조건부 융자' 제도
비슷한 제도는 다른 공공기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용보증기금은 올해 ‘투자브릿지 보증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성장성이 검증된 스타트업에 VC와 모험자본을 적극 공급하겠다는 취지다. 시드(초기) 투자단계부터 시리즈B까지 구간을 나눠, 브릿지 자금의 보증상품을 제공하는 형태다. 이때 매출액 등 재무적 성과 대신 민간 투자금액을 기반으로 보증을 지원한다. 최대 한도는 20억원이다.신보 관계자는 “다음 달 중순부터 신청을 받을 예정인데, 자사 포트폴리오를 심사받게 하려는 VC들 문의가 벌써 몰리고 있다”고 전했다. 매칭 플랫폼 사업인 ‘U-Connect’도 있다. 데모데이와 소통 플랫폼 등을 운영하며 스타트업과 투자사를 연결하는데, 541개 스타트업과 50개 투자사가 참여하고 있다. 실제 매칭이 발생할 경우 1년 이내, 투자 유치액의 최대 3배 이하로 신보가 보증을 선다.
선진국은 융자기관 유인책 측면에서 더욱 진보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투자조건부 융자(Venture Debt)’ 제도는 아직까지 국내엔 정식 도입되지 못한 제도다. 스타트업이 투자 유치에 성공했고, 추가 투자 유치 가능성도 높다면 저금리에 대출을 진행해 주는 형태다. 스타트업은 후속 투자금을 통해 대출금을 상환하며 저금리에 대한 대가로 소액의 지분인수권을 부여한다. 이 과정에서 융자기관은 대출심사 정보를 제공하고, 투자사는 투자심사정보를 융자기관에 주기도 한다.
투자사의 신용을 통해 급한 자금을 마련한다는 점에선 일견 최근 공공기관의 프로그램들과 유사하다. 하지만 미국은 해당 제도를 이용하는 스타트업이 5개 중 1개에 이를 정도로 활용도가 높다. 주식 가치가 오를 기대도 있어 융자기관에 대한 유인책도 보다 확실하다. VC가 신용도 보강에 나서는 현재 프로그램에선 시중은행 등을 향한 혜택이 사실상 없다. 이 때문에 정책금융을 집행하는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관련 대출이 집중됐다는 분석이다.
국내에서도 도입 준비는 진행되고 있다.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1년 발의한 ‘벤처투자 촉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투자조건부 융자 제도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상임위(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심사를 거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 역시 지난해 11월 ‘민간이 끌고 정부가 밀어주는 역동적 벤처투자 생태계 조성 방안’을 발표하며 투자조건부 융자제도 도입 의사를 밝혔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을 통해 500억원 규모로 제도를 시작해 다른 기관으로 확장하겠다는 목표다. 입법 도입 취지가 현실화하면 시중은행 등 민간자본도 스타트업 융자 규모를 확대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전망이다. 대출은 대부분 단기 운전자금 용도로도 많이 찾는 만큼 지분 거래를 복잡하게 느끼는 창업가 수요가 몰릴 수 있다.
법은 내부의 다른 조항(투자목적회사의 차입한도 규정) 때문에 통과되지 못하다가, 최근 속도를 내고 있다. 강훈식 의원실 관계자는 “현재 스타트업 자금 시장을 고려할 때 세 차례 법안소위를 거치며 법 개정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상당히 형성된 것으로 안다”며 “다만 대기업집단 특수목적법인(SPC)의 차입 한도가 확대되는 부분은 공정거래법과 상충 우려가 제기됐는데, 이 부분이 해소되면 조만간 산자중기위를 통과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