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이건 실수일까 잘못일까? 이런 걸 잘못이라고 하는 거야! 스튜어디스 혜정아! 다 알면서 하는 거! 다치라고 하는 거! 네가 매일매일 나한테 한 거!”
학교폭력을 다루며 사회적 책임감과 공감대를 증폭시킨 드라마 ‘더 글로리’의 대사다. 한순간 스타가 됐다가도 학폭으로 한 번에 나락으로 추락하는 아티스트를 보면 딴 세상 이야기 같다. 우리 세상의 이야기로 누군가에겐 영혼까지 잃게 하는 상처, 또 누군가에게는 흉터로 기억되는 순간의 기억을 선명하게 담고 있다.
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자 학폭 피해자인 문동은(송혜교 분)은 패션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때론 위협적인 감정에서 스스로를 방어한다. 절망과 절제의 시크한 블랙룩, 보수적 컨템포러리 감성을 담은 ‘컨서버티브 포멀룩’이 문동은의 기본 패션이다. 때로는 모던클래식의 낯익은 스타일링이 포멀하면서도 감각적인 패션을 보여준다. 성별의 고정관념을 버린 중성적인 젠더테일러룩은 문동은의 강한 카리스마를 대변하기도 한다. ‘더 글로리’ 속 고혹적이고 차분한 문동은의 패션은 다음 시즌으로 이어질 복수극을 더 기대하게 한다.
블랙룩
검은 선글라스와 함께 올 블랙의 문동은이 등장한다. 다소 무미건조해 보이는 표정에선 어떤 상황도 읽어낼 수 없다. 과거의 상처를 가리듯 흉터를 만든 장본인을 만날 때면 늘 블랙룩의 문동은이 나타난다. 미니멀한 아이템으로 마치 바둑의 흑돌을 상징하기도 한다. 문동은은 바둑을 둘 때 흑돌을 손에 쥐고 선공한다. 백돌이 강자라면 흑돌은 약자지만 선공할 수 있는 입장이 전략적이면서도 미학적이다.
블랙은 어둠과 절망 같은 부정적 이미지와 함께 강력한 위엄과 격조 높은 세련된 느낌의 이중적 컬러 심리를 가지고 있다. 바둑의 흑돌과 문동은의 미니멀한 블랙룩은 그녀를 억누른 분노와 복수를 가장 세련되게 표현한다. 나를 가장 뚜렷하게 보이고 싶은 날이라면? 미니멀한 블랙룩은 언제나 옳다.
컨서버티브 포멀룩
문동은은 복수극에 나서면서 밝은 컬러의 테일러드 롱 재킷과 와이드 팬츠를 스타일링했다. 여성스러운 라인과 디테일로 보수적이고 세련된 컨템포러리 감성을 잘 표현한 패션이다. 복수에 대한 결의를 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 문동은의 얼굴에 미세하게 미소가 피어나는 순간과 겹친다. 문동은의 컨서버티브포멀룩은 긴 시간 기다려온 복수의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이 코디에서 문동은의 다소 여유 있는 핏감은 긴장감을 더 고조시킨다. 목까지 꽉 잠근 그녀의 셔츠에선 멈출 수 없는 증오의 결연함이 느껴진다. 상대방의 긴장감을 해제시키는 여성스러운 라인과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각을 살린 테일러드 롱 재킷의 매칭은 문동은의 여유와 카리스마를 동시에 뿜어낸다.
젠더리스룩
젠더리스는 최근 패션계의 핵심 키워드다. 남녀의 구분이 사라진다는 건 사회적인 힘의 구분도 희미해진다는 것. 그래서 젠더의 개념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변한다. 남녀 구분 없는 와이드 핏의 트렌치코트를 무심한 듯 스타일링한 문동은은 과거의 흉터 역시 무심하게 드러낸다. 영혼까지 너덜너덜했던 과거의 문동은이 아닌 상처를 단단하게 포장하듯 다소 중성적인 트렌치코트를 입는다. 넉넉한 핏은 과거의 그녀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게 한다. 마치 우연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좀 더 과감하게 나를 표현하고 싶다면 중성적인 젠더리스룩을 추천한다. 모던 클래식룩
‘더 글로리’ 문동은의 캐릭터에 많은 이가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던 클래식룩’ 덕분이다. 과감하지 않지만 우아하고 감각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모던 클래식룩은 보는 이들이 차분한 감정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채도가 낮은 색감의 매치는 저음의 또랑또랑한 문동은의 대사에 안정감을 더해준다. 트렌드에 집중하는 기존 드라마의 패션 공식과 달리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마치 수학 공식으로 계산이라도 한 듯 한 신 한 신 계획된 패션을 선보인다. 정주행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가슴 속에 깊이 남아있는 그 장면들 속에는 올블랙의 혈색 하나 없는 무표정의 문동은이 서 있다.임승희 인덕대 방송뷰티학과 교수·스타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