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파트 잔금 치르려고 전세를 내놓는 집주인이 일시에 몰려 매물이 급증했는데, 전셋집 찾는 사람이 없으니 호가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네요.”(서울 동작구 흑석동 D공인 관계자)
서초구 반포동, 강남구 개포동, 동작구 흑석동 등 서울 강남권의 전셋값 하락세가 가파르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공급이 달려 전셋집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올 들어선 보증금을 1~2년 전보다 수억원 낮췄는데도 세입자를 찾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고금리 여파로 ‘전세의 월세화’가 심해지는 가운데 강남에 유례없이 많은 새 아파트 입주 물량까지 쏟아지면서 전셋값을 큰 폭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흑석 신축 전용 84㎡ 전셋값 5억원대
7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서초구 반포동 랜드마크로 통하는 반포자이 전용면적 84㎡는 지난 5일 12억3000만원에 전세 계약이 체결됐다. 작년 6월 최고가(22억원)와 비교하면 6개월 만에 반토막 가깝게 떨어졌다. 강남구 개포동 디에이치아너힐즈 전용 84㎡도 2021년 9월 전세 보증금이 18억5000만원까지 치솟았지만 직전 거래인 지난달 4일엔 11억원까지 하락했다.송파구에선 9000가구가 넘는 가락동 헬리오시티 전용 84㎡ 전세 거래가가 작년 3월 15억8000만원에서 지난 4일 7억1400만원으로 55% 급락했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의 아파트 전세가율(매매가격 대비 전셋값 비율)은 각각 46.87%, 44.12%, 46.41%였다. 관련 통계가 작성된 2013년 4월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준강남으로 불리는 동작구 흑석동 상황도 비슷하다. 오는 28일 입주가 시작되는 흑석리버파크자이는 전체 1772가구 중 19%인 338가구(아실 집계)가 전세 매물로 나와 있다. 전용 84㎡(일반분양가 10억590만원)의 전세 호가는 6억~6억3000만원에 형성돼 있다.
흑석동 A공인 관계자는 “최근 열흘 새 ‘급급전세’ 매물이 많이 빠지긴 했지만, 잔금일이 임박하면서 가격을 크게 내려서라도 세입자를 구해 달라는 집주인이 계속 나오고 있다”며 “하루이틀 안에 계약금 1000만원가량 내면 5억5000만원에 거래가 가능한 매물도 있다”고 전했다.
올해 강남에 1만1000가구 ‘입주 폭탄’
강남권 전셋값이 큰 폭으로 떨어지는 데에는 2020년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으로 전셋값이 비정상적으로 급등한 데 따른 후유증과 고금리가 겹친 영향이 가장 크다. 2020년 7월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 상한제 도입 당시 재계약했던 전세 매물이 대규모로 풀리면서 공급 과잉을 빚고 있는 것이다. 전세 대출 금리가 연 6%를 웃돌면서 월세살이를 선호하는 세입자가 늘어 수요도 급감했다.올해 역대급 ‘입주장’이 열리는 것도 전셋값 하락에 불을 붙이고 있다. 부동산 정보업체 부동산R114에 따르면 올해 강남·서초·송파·동작구 입주 물량은 1만1463가구(임대주택 포함)다. 작년(5972가구)의 두 배에 육박한다. 당장 다음달 개포동 개포자이프레지던스 3375가구를 시작으로 8월 반포동 래미안원베일리(2990가구)와 내년 1월엔 개포동 디에이치퍼스티어아이파크(6702가구) 입주가 예정돼 있다. 현재 시장에 풀린 개포자이프레지던스 전세 매물만 1330건에 달한다. 이들 아파트 입주가 본격화하면 전셋값은 지금보다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업계에선 집주인이 신규 세입자에게 받는 보증금으로 기존 임차인의 보증금을 충당하지 못하는 ‘역전세난’이 강남에서도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여경희 부동산R114 수석연구원은 “집주인은 여유 현금을 마련하고, 세입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보증보험에 가입해두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하헌형/안시욱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