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루가 30시간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그러면 피아노 연습을 더 많이 할 수 있잖아요.”
지난 4일 화상으로 만난 피아니스트 조성진(29·사진)은 이 얘기를 하면서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연주 투어 일정에 쫓겨 연습할 틈이 없다는 걸 어린아이처럼 투정하는 게 아니었다. 머릿속은 ‘새로운 곡을 익혀야 해. 기량도 끌어올려야 해. 그러려면 연습할 시간이 필요해’란 생각으로 가득하지만, 그가 연습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현실에 대한 예술가의 고민이 담겨 있었다. 조성진은 “새로운 작품을 배우면서 희열을 느낀다”면서도 “연주 투어 일정을 소화하면서 새로운 곡을 익혀야 하는데, 항상 시간이 부족해 고민”이라고 했다.
이날 화상 기자간담회는 그가 여섯 번째 정규 앨범 ‘헨델 프로젝트’를 세계적 클래식 음반사인 도이치그라모폰(DG)을 통해 내놓은 걸 계기로 마련됐다. 고전·낭만주의 작품을 주로 다룬 전작과 달리 이번 앨범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헨델의 음악으로 주요 레퍼토리를 채웠다. 음반에는 1720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나온 헨델의 ‘하프시코드 모음곡’ 중 ‘2번 F장조’, ‘8번 f단조’, ‘5번 E장조’와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등이 담겼다.
조성진은 “바로크 음악은 (그 맥락을) 온전히 이해한 뒤 연주에 자신감이 붙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헨델 레퍼토리의 음반을 준비한 때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연습한 시기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작년 2월 코로나19로 해외 투어가 취소되면서 한 달짜리 휴가가 생겼어요. 매일 7~8시간씩 연습했습니다. 이지적인 바흐 작품보다 가슴을 울리는 멜로디가 잘 느껴지는 헨델 작품이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헨델 또한 만만치 않다는 걸 체감했죠.”
그는 바로크 음악의 매력으로 ‘해석의 폭이 넓은 것’을 꼽았다. “바로크 음악은 고전·낭만주의보다 악보 안에 담긴 ‘지시’가 훨씬 적어요. 그래서 연주자가 보다 자유롭게 작품을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헨델이 좋아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작품을 해석했어요.”
조성진은 ‘언제 행복을 느끼냐’는 질문에 “해외 투어를 마치고 집에 와서 쉴 때”라고 답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에요. 집에서 피아노를 연습하는 것, 새로운 악보를 사서 공부하는 것, 혼자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등 작은 순간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는 한국 연주자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높아진 걸 체감한다고 했다. “1년 전부터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국제 콩쿠르를 휩쓴 한국 연주자가 하도 많다 보니 해외 매체와 인터뷰할 때마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클래식 음악을 잘하냐’는 질문이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제 답은 언제나 똑같아요. ‘원래부터 잘했다’죠.”
2015년 ‘세계 3대 콩쿠르’인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뒤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파 피아니스트로 성장했지만, 조성진은 “아직 멀었다”고 했다.
“올라갈 길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해요. ‘제 연주를 찾아주는 청중이 도시마다 1000~2000명 정도만 있으면 너무나 감사할 것 같다’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예요. 무엇보다 청중에게 멋있고 위대한 음악을 들려드리는 데 집중할 겁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