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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라이프이스트-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빈틈이 없어야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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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때부터 내려온 구구단의 이름은 중국 관리들이 평민들이 알지 못하게 일부러 어렵게 9단부터 거꾸로 외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구구단(九九段·요즘 학교에서는 곱셈 구구라 한다)을 어렵게 배웠다. 초등학교 때 외우지 못해 나머지 공부를 했다. 그래도 다 외우지는 못했다. 어둑해질 때 돌아오자 아버지가 주먹구구 셈법을 가르쳐주었다. “어떤 게 안 외워지느냐?”고 해 “7x8”이라 했다. 그날 배운 주먹구구를 다시 해보자. 왼손에 7, 오른손은 8을 각각 펼치면 펴진 손가락과 구부린 손가락이 나온다. 펴진 손가락 2310단위로 한다. 더하면 50이다. 구부린 손가락 32는 서로 곱하면 6이 나온다. 그래서 7x8=56이 된다. 잘 안 외워지던 9x7도 같은 방법으로 하면 거뜬하게 답을 구할 수 있다.

애써 구구단을 외울 필요가 없겠구나 싶은 생각이 스칠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주먹구구 셈법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5 이하는 계산이 안 된다. 그건 암산해야 한다. 암산은 너만 알고 남은 모른다. 사람들은 모르면 믿지 않고 믿지 못하면 따르지 않는다. 구구단은 약속이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언어나 문법을 쓰지 않으면 남을 이끌 수 없을뿐더러 일이 안 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주먹구구란 말은 저렇게 생겨났다. 말씀이 끝나자 아버지는 구구단을 다 외울 때까지 학교에 열 번이고 갔다 오라고 했다. 다 외웠다고 자신하면 한 번만 갔다 와도 된다고 했다. 캄캄한 길을 더듬어가며 몇 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에게 검사받을 때는 거침없이 외웠다.

아버지는 어린 자식이라고 해서 쉬운 말로 바꿔 말하지 않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영과후진(盈科後進)이란 고사성어를 말씀하셨을 테지만 그때는 알아듣지 못했다. 영과후진은 구멍을 가득 채운 뒤에 나간다라는 말이다. 물이 흐를 때 오목한 곳이 있으면 먼저 거기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아래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흘러가지 않는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편에 나온다. 제자 서자(徐子)가 물의 철학을 묻자 맹자는 물이 가진 의미를 자세히 설명했다. “샘이 깊은 물은 끝없이 용솟음친다. 그러기에 밤낮을 쉬지 않고 흐를 수 있다. 흐르다 웅덩이에 갇히면 그 웅덩이를 가득 채우고 다시 흐른다, 그리하여 바다까지 멀리 흘러갈 수 있는 것이다[原泉混混 不舍基夜 盈科後進 放平四海].”

그 후에도 여러 번 말씀하셨을 영과후진은 고등학교 합격자 발표날 아버지가 운동장에 물 고인 웅덩이마다 지팡이로 물꼬를 터줄 때 비로소 알아들었다. 그날 아버지는 물은 웅덩이를 가득 채우고 흘러넘쳐야 비로소 다시 흘러간다. 갈 길이 바쁘다고 웅덩이를 건너뛰고 흘러가거나 대충 절반만 채운 다음에 흘러가는 물은 없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바로 이어서 웅덩이에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걸 잘 봐라. 물은 웅덩이 밑바닥부터 시작해 꼭대기까지 마치 구구단을 외우듯, 옆구리에 숨겨진 데까지 빠짐없이 차곡차곡 소리도 없이 채워간다. 저게 일이 이루어지는 원리다. 일은 주먹구구 셈법처럼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일이 틀어지는 이유는 미처 채우지 못한 데에 틈이 생겼기 때문이다. 빈틈없이 해야 일은 이루어진다라고 강조했다.

주먹구구로 세상의 일을 얕은 꾀로 점치지 말라고 강조한 아버지는 저런 물의 이치에 맞는 언행을 가지길 바란다. 그걸 깨우쳤으면 학교 그만 다녀도 된다고도 했다. 이치에 맞는 합리성에서 일을 성사시키는 힘이 나온다. 그런 합리성을 추구하려는 의지는 순전히 꾸준한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다. 손주들에게 가르칠 합리성 추구 훈련은 그래서 일찍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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