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같이 죽인거나 똑같죠"
2020년 6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는 1999년 제주에서 살해당한 이승용 변호사 사건을 교사했다는 A씨가 등장해 이같이 말했습니다.
A씨는 자신이 제주 유탁파 소속이었으며, 두목 백씨에게 '이 변호사를 손을 봐주라'는 지시와 함께 3000만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를 같은 조직 B씨에게 맡겼으나, 일이 잘못돼 이 변호사가 사망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A씨는 공소시효 소멸을 믿고 방송에 나와 이런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에서 확인결과, A씨가 과거 해외에 거주했던 이력이 확인됐습니다. 피고인의 해외 도주 기간은 공소시효에 포함이 되지 않기 때문에, A씨 범죄의 공소시효는 태완이법(살인죄 공소시효 폐지) 도입 전까지 소멸되지 않았던 것이죠.
결국 사건은 재수사에 들어갔고, 해외에 있던 A씨는 살인사건의 공동정범으로 체포돼 송환됐죠. 그리고 이 사건은 올해 1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결과는 '무죄 취지 파기환송'. 2심에선 유죄가 인정돼 12년형을 선고 받았지만, 대법원에서 결과가 뒤집힌 것입니다. A씨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결과가 나온걸까요?
A씨의 진술은 '구체적 사실'과 다르다?
대법원은 A씨의 진술 내용을 "피고인의 제보 진술이 형사재판에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고 공소사실을 입증할 만한 신빙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A씨의 진술이 '구체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는 지적입니다. 또한 형사사건에서 직접증거가 아닌 간접증거로만도 처벌할 순 있지만,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간접증거가 치밀해야 합니다. 그러나 A씨 진술의 구체성에는 의심이 드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지적한 것은 바로 "유탁파 두목 백모씨와 제주 모처에서 만나 이 변호사를 손 봐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진술입니다. 당시 백씨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아 광주교도소에 복역 중이었습니다. 밖에서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돈을 받았다는 정황적 증거도 없어, 이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A씨는 조사 과정에서 범행 지시자가 백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진술을 번복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처음에 왜 백씨라고 거짓말했는지, 백씨가 아니면 누가 지시한 것인지 등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이 사건의 범행 동기를 입증할 수 있는 길이 사라졌다는 판단입니다.
B씨에 대한 진술도 사실과 달랐습니다. A씨는 "범행 이틀 후 B씨를 서울로 올려보냈고, B씨는 4-5년 동안 제주에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B씨는 공소시효를 얼마 남기지 않고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했다"고도 했죠.
그러나 B씨는 2001년 제주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자살의 원인도 죄책감이라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B씨의 유서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없으며, B씨의 지인도 B씨가 사망 전에 "금전적인 문제때문에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거짓이 섞인 A씨의 진술을 유죄 입증의 증거로 보기에는 신빙성이 부족했다는 지적입니다.
원심이 인정한 증거도...'불충분'
대법원은 원심이 인정한 증거들마저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판단을 내놨습니다. 진술이 구체적이나, 살인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해당 내용을 알 수 있었다는 판단입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A씨가 이 변호사를 살해한 흉기로 지목한 '과도를 갈아낸 칼' 입니다. 이 변호사는 일반적인 칼보다 훨씬 폭이 얇은 칼로 찔려 사망했습니다. A씨는 '그것이 알고 싶다' 팀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흉기를 그리며 '과도를 갈아낸 칼'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A씨의 진술에 따르면 "제주 폭력범죄단체에서는 칼날을 얇고 좁게 갈아서 만든 형태의 흉기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프로그램 제작진은 비슷한 모양의 흉기를 만들어서, 해당 흉기가 사람의 흉골을 뚫을 수 있다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A씨가 범행에 가담했음에 신빙성을 더했죠. 원심 역시 이 부분을 살인 가담의 정황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대법원은 "흉기 제조 방법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술했다"면서도 "흉기의 크기·형태에 대해 언론에 자세히 보도됐으므로, 피고인이 이러한 보도를 통해 폭력조직에서 많이 사용하는 칼날을 갈아서 폭을 좁게 만들었다고 추측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외에도 A씨는 사건이 일어난 초등학교 인근에 대해 '현장이 암흑이고, 인적이 드물다'는 언론에 정확히 보도되지 않은 내용도 진술했습니다. 원심은 이 역시 살인 사건 가담의 증거로 봤습니다. 다만 대법원은 "A씨가 해당 초등학교 인근에 살았다는 취지로 진술한 점에 비춰보면, 원래 알고 있던 정보를 이야기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진 사건
대법원은 A씨의 살인 혐의에 대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됐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다만 A씨가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 이후 사건이 재수사에 들어가자, 제작진에게 보복을 암시하는 협박 메시지를 보낸 혐의에 대해서는 원심의 징역 1년 6개월형을 확정했습니다.
A씨의 살인 가담 재판은 다시 제주고법(광주고법)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검찰도 이번 사건의 입증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1999년에 일어난 사건인 만큼 남아있는 증거가 불충분했고, 피고인의 진술을 대질해볼 수 있는 유탁파 두목 백씨와 범행을 직접 저지른 B씨가 모두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형사재판은 "100명의 범죄자를 풀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한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 말라"는 원칙 아래 판결이 이뤄집니다.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만큼 증명이 이뤄져야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입니다.
죄를 입증할만한 추가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A씨는 자백에도 불구하고 살인 혐의를 피하게 됐습니다. 또한 이 변호사의 피살 사건 역시, 다시 장기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습니다.
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