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에서 디지털시대로 전환되면서 생겨 온 변화들은 무수히 많다. 그중 하나가 직업이다. 대부분의 산업군이 디지털화되면서 그에 맞게 새로운 직업군이 탄생하고 있다. 특히 기술 영역의 직업은 산업의 흐름에 맞게 더욱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필드 애플리케이션 엔지니어(Field Application Engineer, FAE)’ 역시 새로운 기술의 탄생과 진보로 IT기술 기업에선 없어서는 안 될 직업으로 자리 잡았다. 기술 전문성과 비즈니스 마인드를 겸비해야 하는 이 직업은 디지털 시대 대표적인 멀티플레이어 직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아날로그와 임베디드 프로세싱 칩을 설계 및 제조·유통하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 이하 TI)에서 FAE로 10년 간 근무 중인 허정혁 차장을 만나 ‘직업의 세계’를 들어봤다.
필드 애플리케이션 엔지니어는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가요.
“필드 애플리케이션 엔지니어(Field Application Engineer)는 반도체를 사용해 제품을 만드는 고객사를 대상으로 TI의 반도체가 적용될 수 있는 기회를 파악하여 우리 제품을 적극 소개하고,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기술 지원을 하는 역할입니다. 예를 들어, 냉장고나 세탁기, 자동차 등의 완제품을 만드는 기업에서 구상하는 기능을 TI 제품으로 구현할 수 있는지 제안하고, 실제 TI 제품을 사용할 때 가이드를 하거나 칩(반도체)을 좀 더 잘 활용할 수 있게 안내하는 역할이죠.”
삼성이나 SK 등 국내기업은 물론 글로벌 기업에서도 반도체를 개발·생산하는 기업이 많은데, 각 기업에서 만드는 반도체 제품이 다른가요.
“반도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종류와 기능, 사용처가 다양합니다. TI의 경우 아날로그 반도체를 주력으로 생산하죠. 예를 들어, 전기차 한 대를 제조할 경우 메모리 반도체, 아날로그 반도체 등 수많은 반도체가 들어가게 되는데, 각각의 반도체 제품마다 쓰임새가 다르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FAE는 고객사에 제품을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할 수 있는지 도와주는 역할···TI는 전 세계 14개 제조 현장에서 매년 수천억 개의 반도체 칩 생산하는 글로벌 기업”
최근 반도체기업이 주목하고 있는 시장(분야)은 어디인가요.
“아무래도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전기차 시장이에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전기차 보급이 늘어나고 커질 시장이라 보고 있는 거죠. 그리고 TV나 냉장고, 세탁기 등 컨슈머 일렉트로닉스(가전)의 매출 비중은 여전히 높아 주력하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TI는 어떤 회사인가요.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TI는 1930년에 설립돼 전 세계 14개 제조 현장에서 매년 수천억 개의 반도체 칩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 아시아 지역에 3만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 지사를 운영 중입니다.”
반도체를 잘 활용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반도체 칩이 들어가야 할 곳에 삽입하는 것 외에 더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건가요.
“그렇죠. 저희가 개발한 칩을 어떻게 하면 성능이 잘 나올 수 있는지를 알려드리는 거죠. 칩 하나의 설명서가 약 4천 페이지 정도 됩니다. 일반적으로 저희 칩을 구매하는 기업에서는 설명서를 다 보진 않거든요. 어떤 특징이 있는지, 어떻게 활용하면 더 성능을 낼 수 있는지를 고객사에 설명하고, 설계에 참여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럼 FAE는 4천여 페이지나 되는 제품(반도체 칩) 설명서를 꿰고 있어야겠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 직업명에 ‘애플리케이션 엔지니어’가 들어가는 이유도 제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이드하는 역할을 해서인 거죠.”
“고객의 상황에 맞춰 반도체 칩 제품이 최선의 성능을 낼 수 있게 하는 가교 역할···고객사와 직접 커뮤니케이션 통해 활용도 및 기능성 높여”
그럼 근무는 보통 어떻게 하나요. 일반적으로 사무실 근무가 그리 많지 않겠군요.
“보통 고객사로 출근하거나, 필요하다면 고객사에 몇 개월 간 파견을 갈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자율출근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사무실로 출근할 경우 오전에는 각 고객사에서 온 문의 메일을 확인하고 답변을 보내고요. 제가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은 본사의 엔지니어에게 연결을 시켜주기도 하죠. 오후에는 실험실에서 제품 테스트를 하면서 공부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엔지니어들이 업무시간에 제품에 대해 공부할 시간을 할애해주는군요.
“TI는 각 구성원이 갖고 있는 목표(priority)를 달성하기 위해 개개인에게 어떻게 일을 할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본인의 일은 각자 알아서 업무를 조율하고 진행하는 편이에요. 직무 자체가 제품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내가 좀 더 깊게 공부해보고 싶다면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고, 반대로 고객사 관리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스스로 판단해 진행하면 됩니다.”
‘FAE’ 직무로만 봤을 땐 보수적인 문화가 있을 것 같은데, 업무 자율성이 있군요.
“맞습니다.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추구하고, 보여주기식 업무를 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희 직무는 스스로의 판단이 굉장히 중요하죠. 스스로 옳다고 판단한 건 회사도 지원을 아끼지 않거든요. 그런 부분이 굉장히 매력적이죠. (웃음)”
“FAE 스스로 업무를 판단하고 추진할 수 있는 근무환경···기술적 지식과 세일즈 마인드 갖춘 능동적인 자세 필요”
제품에 대한 기술적인 부분을 완벽히 알아야 하는 만큼 세일즈 마인드도 갖추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떤가요.
“저는 TI안에서 영업조직에 속해 있는데요. TI 영업조직에는 기술영업, FAE, 마케터 등의 직무가 있습니다. 저는 FAE로서 기술영업 담당자와 함께 고객사에서 TI의 제품을 더 많이 사용하도록 하는 미션을 갖고 있어요. 이를 위해서 주로 고객사의 엔지니어와 소통을 하는 편이고 그래서 기술적 전문성이 중요합니다. 기술적 전문성에 그치지 않고, 제가 지원하는 일이 비즈니스 관점에서 어떤 의미인지, 산업 트렌드와 시장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FAE가 갖고 있는 미션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FAE가 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요.
“직업적으로 갖춰야 할 부분은 능동적인 자세를 꼽을 수 있어요. 저희 일은 제품을 사용할 프로젝트를 발굴하는 것부터 시작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처음 만나는 분들에게 필요사항을 파악하고, 그 부분을 도와드려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이면서도 능동적인 자세로 접근해야 합니다. 또 일의 범위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프로젝트나 고객사별로 기술지원 범위가 달라질 수 있는데요. 그 범위도 스스로 판단해 결정하기 때문에 능동적인 자세가 중요하죠.”
이를테면, 한 고객사와 계약을 맺은 후 어느 선까지 기술적으로 투입이 돼야 한다는 가이드가 있는 게 아니라 고객사 또는 현장의 컨디션에 따라 FAE가 하는 역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죠. 아까 세일즈 마인드를 말씀하셨는데, 그 부분에서 엔지니어가 고객사에 더 자주 방문한다거나, 제품 활용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면 영업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어요. 그리고 기술은 계속 진보해 나가고, 시장 상황도 바뀌기 때문에 지원범위나 제품군은 늘 바뀔 수 있어요. 업무환경에 변화가 있더라도 짧은 시간 내 변화에 적응하고 결과를 낼 수 있는 유연한 적응력도 필요합니다. 또 직업 특성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원활한 대인관계도 중요하죠.”
전공도 중요할 것 같은데, 어떤 전공이 유리한가요.
“전자회로와 IC(integrated circuit)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전기전자계열 전공이 아무래도 유리하죠. 또 TI는 글로벌 회사이다 보니 전세계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영어 의사소통이 원활하다면 도움이 되겠지만, 원어민 수준일 필요는 없습니다. 영어로 소통하는 환경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FAE의 경우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게 되면, 6개월 이상 직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식 및 skill을 함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제공됩니다. 담당 제품에 대해선 스페셜리스트가 돼야 하기 때문에 충분한 능력개발 시간이 주어지는 셈이죠.”
직업적으로 FAE의 장단점은 뭐가 있을까요.
“장점이라면 업계에서 가장 핫 하거나 수요가 많은 기술과 제품을 미리 경험해 볼 수 있다는 점이죠. 그리고 일반적인 엔지니어는 한 가지 분야의 기술을 깊게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FAE는 시장 상황이나 기술의 진보에 의해 항상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을 서포트하게 되니 기술적으로 도태되지 않는다는 점도 있죠. 또 업무나 분야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 향후 시장성이 있는 분야라 생각되면 그 분야에 더 집중할 수도 있어요.”
단점은 없나요.
“제가 10년 넘게 이 일을 해왔는데, 아직 단점은 찾지 못했어요. (웃음) 일을 한만큼 보상도 받거든요.”
향후 FAE의 비전은 어떻게 보시나요.
“생활가전부터 자동차(전기차) 전장, 산업용 제품 등 분야를 막론하고 반도체 사용량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반도체 공급부족 사태가 생길 만큼 다양한 곳에 점점 더 많은 반도체가 사용될 예정이죠. 그만큼 더 많은 FAE가 필요로 하게 된다는 뜻인데요. 10년 간 하면서 든 생각은 시장에서 꾸준히 필요로 하고, 기술 그리고 영업 면에서도 역량을 펼칠 수 있는 매력적인 직업이라 생각합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사진=김기남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