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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정실 내쫓고 왕비가 된 장희빈과 앤 불린, 비극적 결말까지 닮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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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태정태세’로 시작하는 암기법으로 조선 왕조를 배웠다. 왕권의 나라가 아니라 신권(臣權)의 나라를 왜 그렇게 가르쳤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임금을 중심으로 조선을 공부하면 사대부의 나라였던 조선 정치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어렵다. 가령 현종 때의 예송 논쟁과 숙종 때의 환국(換局)은 임금 단위로 끊어 볼 별도의 사건이 아니다. 서인이 남인을 끌어들여 북인 정권(광해군)을 붕괴시킨 후 둘 사이가 틀어진다. 그래서 둘은 5라운드를 뛰게 되는데 그게 두 차례의 논쟁과 세 번의 환국이다. 논쟁은 점잖았다. 논리로 싸웠고 패자에게도 관대했다. 1차 환국인 3라운드부터 말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남인의 입에서 서인 거두 송시열을 향해 역적이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4라운드부터는 서로에게 약을 먹인다. 마지막 5라운드에서 서인은 다시는 이 땅에 정치 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남인을 토벌한다. 이전 전투에서 사상자가 많이 나와 악에 받친 서인 노인네들을 노론이라 불렀고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어 남인 처리에 유화적이었던 소장파를 소론이라고 불렀다.

숙종이 환국의 동력으로 활용한 것은 여인들이었다. 그중 두 번째 환국에 동원된 게 장희빈인데 아시다시피 숙종은 그녀를 사사(賜死)한다. 이 때문에 왕비를 둘이나 죽인 영국 왕 헨리 8세와 단골로 묶이지만 실은 숙종과 헨리 8세의 공통점보다 더 닮은 게 장희빈과 첫 번째 참살(斬殺) 왕비인 앤 불린이다. 둘 다 정통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고 정실부인을 쫓아내고 왕비가 되었으며 남편에게 살해된 후 자녀가 왕위에 올랐다. 왕비를 밀어낸 실력으로는 앤 불린이 몇 수 위다. 장희빈은 여흥 민(閔)씨 등 외척 세력과 서인이 그 상대였지만 앤 불린은 카스티야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녀를 몰아냈다. 헨리 8세의 정실이자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은 원래 헨리 8세의 형수다. 헨리 8세의 아버지 헨리 7세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로 원수인 프랑스와 대립하던 에스파냐에서 며느릿감을 물색했고 두 살배기 캐서린을 찜한다. 나이가 찬 캐서린은 15살 되던 해에 결혼을 위해 영국으로 건너간다. 남편인 아서는 캐서린이 마음에 들었고 동생인 나중의 헨리 8세도 미모의 외국 공주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영국의 엄청난 지참금 요구로 몇 번의 위기 상황이 벌어지긴 했지만 아서와 캐서린은 우여곡절 끝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아서가 감기로 사망하자 졸지에 과부가 된 캐서린의 입지가 난처해진다. 그 와중에 헨리 7세는 사돈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지참금을 다 보내지 않았다며 잔금 지급을 요구했고 페르난도 2세는 지참금을 다 보냈다고 잡아뗀다.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가 서로 나 몰라라 하는 동안 캐서린은 오리알이 되어 궁핍의 세월을 보낸다.


헨리 7세가 병사하자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다른 나라 왕녀들과도 혼담을 물리치고 캐서린에게 청혼한다. 근친상간이었지만 헨리 8세는 혼인 무효 사유인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는 캐서린의 주장을 근거로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냈다. 정략결혼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타당성이 없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연합왕국으로 부부 별산제였고 이미 카스티야의 여왕이자 캐서린의 어머니인 이사벨라 여왕이 사망했기 때문에 캐서린이 물려받을 지분은 없었다(그래서 호칭이 아라곤의 캐서린). 그보다는 첫사랑의 실현이라는 게 더 타당한데 실제로 금슬도 좋아 3남 3녀를 출산했다. 다만 높은 영아 사망률 때문에 이 중 딸 하나만 생존했고 이 여아가 나중에 메리 1세로 영국 왕에 등극한다.

세월이 지나 캐서린의 가임 불가 상황에서 어리고 세련된 데다 머리까지 좋은 캐서린의 시녀 앤 불린이 헨리 8세를 사로잡는다. 문제는 이혼이다. 이때부터 헨리 8세는 툭하면 신하들 앞에서 자기가 캐서린과 결혼한 것이 도리에 맞지 않아 마음이 찜찜하다는 말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결혼 생활 20년도 더 지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헨리는 구약 레위기의 한 구절에서 근거를 찾는다. ‘남자가 자기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그것은 부정한 일이니라. 그가 자기 형제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었는즉 그들이 자식이 없으리라.’ 헨리 8세는 반복해서 그 구절을 읽으며 감동에 몸을 떨었다. 헨리 8세는 이런 주장을 담은 편지를 로마 교황청에 보낸다.

시기가 최악이었다. 특사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을 교황으로 밀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를 배신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카를 5세는 3만5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로마를 짓밟고 있었는데 캐서린은 이 카를 5세의 이모였다. 카를 5세의 ‘ㅋ’자만 나와도 오줌을 지리던 클레멘스가 헨리 8세의 청원을 들어 줄 리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헨리 8세는 단독으로 이혼을 강행했고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해 성공회를 차린다. 이때 교황에게 바치던 헌금도 폐지했는데 꿩과 알을 동시에 챙긴 성공적인 이혼이었다.

남정욱 작가·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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