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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 할머니의 '기괴한 그림'…왜 수십억원에 살까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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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을 처음 담당했을 때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일본 작가 쿠사마 야요이(93)의 어마어마한 인기입니다. 경매만 했다 하면 작품이 수십억 원에 팔리고, 한국 경매시장에서도 거래액이 가장 많고, 전 세계가 작품성을 인정한다는데…. 제게는 그 특유의 물방울무늬가 불편하고 기괴하게 다가왔거든요. 작품 세계를 알게 되고 실물을 여러 번 보니 인식이 좀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사람들이 왜 그 돈 주고 쿠사마의 작품을 사는지’를 설명하는 건 여전히 쉽지 않았습니다.

지난 2일 ‘아시아의 뉴욕현대미술관(MoMA)’이라 불리는 홍콩 M+미술관에서 쿠사마의 대규모 회고전을 관람했습니다. 이 전시를 보고 나니 비로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감이 좀 잡히더군요. 이번 전시는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열린 최대 규모의 쿠사마 전시입니다. 쿠사마의 지난 70여년간 작품 세계를 망라했고 아주 인상 깊은 신작들도 세 점 나온 ‘역대급 전시’였습니다.

쿠사마가 누구고, 왜 이런 그림을 그리는지 안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좋게 느껴지리란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왜 이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알 수 있겠지요. 이번 주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이 전시 내용과 함께 쿠사마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금 자세히 설명하고, 인기 비결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함께 전시를 관람한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의 도움을 받았고, 쿠사마의 자서전 <무한의 망>(국내 미출간)과 새로 나온 도록 <쿠사마 야요이:1945년부터 지금까지>를 참조했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광기, 쿠사마를 예술로 이끌다

전시 시작부터 심상찮습니다. 쿠사마의 자화상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1980년대 작품도 있고 2010년대 중후반 그린 비교적 신작들도 있는데요. 통통 튀는 매력의 작품들이지만 저는 ‘정신이 혼미해진다’는 느낌을 조금 받았습니다.

실제로 쿠사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습니다. 쿠사마는 1929년 일본의 중부 소도시인 마츠모토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잣집이었지만, 집안 돌아가는 꼴은 막장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밥 먹듯이 외도했고 어머니는 걸핏하면 어린 쿠사마에게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게다가 어머니는 쿠사마에게 아버지의 외도를 감시한 뒤 보고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섬세하고 예민한 아이였던 쿠사마는 아버지의 외도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고 맙니다.

그러던 어느 날, 쿠사마가 평소처럼 밖에 놀러 나가 앉아 있는데 늘 보던 제비꽃들이 평소와 다르게 보였다고 합니다. “제비꽃은 다 똑같은 줄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제비꽃마다 생김새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의 생김새가 각자 다른 것처럼. 그때 갑자기 제비꽃들이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어찌나 말이 많은지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무서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환각과 환청이 시작됐습니다.

예술은 광기와 가까운 관계입니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뭔가를 포착해서 생생하게 표현하려면 감수성이 무척 섬세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안테나의 감도가 너무 좋으면 잡음이 많이 끼는 법입니다. 그 잡음이 지나치면 환청이 들리고, 정신질환을 앓는 거고요. 쿠사마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쿠사마가 화가가 되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결혼이나 잘하라면서요. 비싼 옷은 여러 벌 사줘도 물감은 절대 사주지 않았고, 쿠사마의 그림을 찢어서 버린 적도 많았습니다. 잘 모아뒀으면 지금 수십억 원은 할 텐데 아깝죠. 쿠사마도 만만찮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쓰레기를 모아 미술 재료로 재활용하는 건 기본, 물감을 훔쳐서 그림을 그린 적도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쿠사마를 교토시립미술공예학교(현 교토시립예술대학)에 보내준 건 순전히 결혼을 잘 시키기 위한 스펙 목적이었습니다.

쿠사마는 학교에서 일본화를 공부했고, 금세 미술계에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일본은 너무 좁았습니다.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극심한 남존여비 문화, 어머니의 반대…. 이 모든 걸 견딜 수 없었던 쿠사마는 ‘큰물’에 가서 놀기로 결심합니다. 당시는 해외여행이 엄청나게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쿠사마는 프랑스 대통령과 20세기 미국 미술 거장 조지아 오키프에게 편지를 보내고, 먼 친척인 우에하라 에츠지로 전 외무차관의 ‘빽’을 쓰는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 기어이 1957년 미국에 발을 딛고야 맙니다.
작은 무늬에 담긴 무한, 생명, 우주

쿠사마는 어쩌다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됐을까요. 자서전에서는 “어릴 적 강바닥에서 빛나는 하얀 조약돌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고, 이번 전시에서는 “비행기에서 본 태평양의 물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설명을 제시합니다. 아마 둘 다 쿠사마에게 영감을 줬을 겁니다. 비행기에서 바다를 내려봤을 때, 얼핏 보면 똑같은 물결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사실 자세히 보면 똑같이 생긴 물결은 하나도 없습니다. 꽃밭도, 숲도 그렇고요. 거창하게 말해 생명과 우주의 원리라고나 할까요. 쿠사마는 이를 작품에 담으려 했습니다.

미국 시애틀에 도착한 쿠사마. 그가 연 첫 전시는 뜻밖의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그의 수채화와 파스텔 그림은 “동양적이고 환상적”이라고 호평받았고, 라디오에도 출연하는 등 현지에서 인정받았죠. 하지만 쿠사마는 여기 만족하지 못하고 현대미술의 중심지 뉴욕으로 또다시 향합니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도시인 뉴욕에서 쿠사마는 금세 빈털터리가 되고 맙니다. 그는 뉴욕 초기 생활을 ‘생지옥’이라고 표현합니다. 캔버스와 물감을 사고 나면 밥 먹을 돈이 없어서, 시장통에서 생선 대가리와 배추 이파리 등 버리는 것들을 모아 국을 끓여 먹었고요. 누가 버린 문짝을 주워다 침대로 삼고, 담요 한 장 덮고 잤습니다. 그래도 그는 작품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원래 있던 정신질환과 빈곤, 작업에 대한 집착이 겹치면서 그는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게 됩니다. “캔버스에 끝없이 그물망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테이블, 바닥 위, 내 몸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신경증은 작업에 도움을 줍니다. 그림 속 무늬가 무한히 뻗어나간다는 생각, 그림이 나고 내가 그림이라는 생각이 작품의 깊이를 더 깊게 만든 거지요. 1959년 브라타 화랑에서 연 뉴욕 첫 개인전에서 그는 또다시 대성공을 거둡니다. 미술계의 한 인사는 제게 농담 삼아 “쿠사마가 미쳐도 정말 곱게 미쳤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듯합니다.


세계 미술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된 쿠사마. 자신감을 얻은 그는 기괴하지만 참신한 여러 시도를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갑니다. 그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 때문에 성(性)을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죠. 두려운 대상을 피하거나, 맞서 싸우는 겁니다.

쿠사마는 맞서 싸우기를 택했습니다. 성적인 소재의 소프트 조각(천과 솜 등 부드러운 재료로 만든 조형 작품)을 만들고 또 만든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물방울무늬를 그려넣었습니다. “물방울무늬를 그려 넣으면 원래 재료는 보이지 않고 물방울무늬만 눈에 띈다. 그러면 무서웠던 것도 무섭지 않게 느껴진다. 그렇게 하나하나 작품을 만들 때마다 나는 두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그런 식으로 그는 많은 것들을 소프트 조각으로 만들고 무늬를 그려넣었습니다. 그리고 미술계는 또다시 열광했죠.

물방울무늬를 그린 이유는 또 있습니다. 물방울 하나에 물방울 하나를 더하면, 물방울 두 개가 아니라 ‘더 큰 물방울 하나’가 되죠. 태초에 우주의 먼지들이 합쳐져 별을 만들었던 것처럼요. 물방울을 나누면 작은 물방울 두 개가 됩니다. 쿠사마는 여기서 세포 분열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호박(일본에선 멍청하거나 못생긴 사람에게 쓰는 욕이었지만, 쿠사마에게는 투박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다가왔습니다)이나 여러 꽃 등에도 물방울무늬를 그려넣게 됩니다. 이런 작업은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잊혔던 쿠사마, 다시 글로벌 슈퍼스타로

좋은 시절도 영원하진 못했습니다. 1960년대 히피 문화에 푹 빠졌던 쿠사마는 반전과 평화를 외치며 누드 행진을 하는 등 과격한 퍼포먼스를 벌이는데요. 당시엔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1970년대가 되자 “너무 과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이와 함께 연인 관계였던 미국 작가 조지프 코넬의 사망, 아버지의 사망, 정신질환 악화 등이 겹치면서 1973년 일본으로 귀국해 1975년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신병원 맞은 편에 스튜디오를 짓고 작업과 치료를 반복하던 쿠사마. 세상은 그를 잊었지만, 쿠사마는 글도 쓰고 그림도 왕성하게 그리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일본 대표 작가로 선정되면서 세계 미술계에서 재조명받기 시작합니다. 쿠사마는 제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세계 미술계가 그를 다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거죠.

그래서 도대체 인기의 비결이 뭘까요.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는 “무한이라는 심오한 주제를 독창적인 그림으로 표현한 점이 대단하다”고 했습니다. “예쁜 걸 예쁘게 그리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새롭고 참신하고 의미 있는 걸 그리는 게 어렵죠.” 미술사적으로 봐도 그의 삶은 의미가 있습니다. ‘철저한 소수자’였던 아시아 여성이 동서양으로 오가며 현대미술 최전선에 몸을 담았고, 결국 글로벌 슈퍼스타가 됐다는 점에서요.

정신질환과 두려움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감동을 받는 사람도 많습니다. 쿠사마는 말합니다. “예술가라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대단한 건 절대 아니다. 정신병에 걸렸다고 해서 작품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반 고흐의 그림이 비싼 건 그가 미쳐서가 아니다. 한 인간이 고난을 극복하려고 끝까지 싸웠고, 그 흔적을 작품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고난에 맞서 싸우는 인간은 존엄하고 아름답다. 나도 내가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끊임없이 고난과 싸우는 한 사람일 뿐이다.”

92세의 나이에도 쿠사마는 여전히 작업실과 정신병원을 오갑니다.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솟아난다. 불면증이 있어서, 졸다 깨서 작업하기를 반복한다. 내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하나라도 더 현실에 남기는 게 내 일이다. 술과 담배를 할 시간도, 다른 작가들과 만날 시간도 없다. ‘좋은 예술을 만들고 싶다’는 게 오직 내 소망이다. 아직도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여전히 그의 작품은 제게 좀 부담스럽습니다(취향입니다). 그럼에도 92세의 나이에 작품세계를 계속 넓혀가며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그가 대단한 건 틀림이 없습니다.

전시를 보는 내내 엄마 손 잡고 전시를 보러 온 일곱 살 어린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무 편견도 없는 솔직한 어린이의 감상은 어떨까요. 어머니의 양해를 구한 뒤 물어봤습니다. “네가 보기에 이 사람 작품이 어떠니?”

“좋아요! 작은 무늬들이 좀 무섭고 징그럽긴 해요. 그렇지만 색깔은 마음에 들어요. 신비롭고요. 하얀 조각 작품들은 색칠해보고 싶어요. 설치작품들은 만지고 입어보고 싶고요. 재미있어요.”

어머니가 정리해준 대답을 듣는데,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더군요. 맞습니다. 예술은 그렇게 즐기면 되죠. 저마다 느끼는 대로 자유롭게요. 당연한 얘기지만 쿠사마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다만 서로의 취향을 이해한다면 좀 더 즐겁게 여러 사람과 대화하며 예술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이 기사가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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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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