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0년(1960~2019년) 동안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평균 2.0%로 나타난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성장모형에서 말하는 기술 진보율이 이 성장률이다. 총요소생산성이 미국을 1로 할 때 60% 수준인 한국이 구매력 기준 미국 소득수준으로 수렴하려면 어떤 성장 속도로 가야 할까. 분명한 것은 성장률 2.0% 수준으로는 미국 소득수준을 따라잡기 어렵다는 점이다(김지욱 <성장의 재역설>).
1960년대 이후 코로나 확산, 글로벌 금융위기, 외환위기, 2차 오일쇼크 때를 제외하면 2.0% 이상 성장률로 달려온 한국 경제 앞에 저성장이 현실로 닥치고 있다. 나라 안팎 전망기관이 잇달아 내년 한국 성장률을 1%대로 내리고 있다. 당초 2.5%로 전망했던 정부도 1%대를 받아들일 모양이다. 세계 경제 성장률이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라지만, 성장률 전망치를 내리는 것 말곤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없느냐는 생각에 이르면 저성장 쇼크가 우려된다.
“세계가 그렇다”고 해도 정부 경제팀도 똑같은 얘기나 하라고 국민이 혈세를 내는 게 아니다. 모두가 어렵다고 할 때 실력이 드러나고 추월·추락·추격의 엇갈림이 일어난다. 직선이 곡선으로 변하는 순간이 그렇다. 세계 경제가 나빠 어쩔 수 없다는 운명론은 추락으로 직행하는 길이다.
경제학 모델은 가정과 전제, 조건을 도입하지만,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변수는 시장 과정에서 나온다. 기술 혁신은 물론이고 환경 변화도 예외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경제 시스템에 외생변수는 없다. 좋든 나쁘든 경제는 벌통 같은 현실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주체의 상호작용이다. 팬데믹도, 미·중 충돌도, 전쟁도, 지정학적 블록화도 내생변수로 본다면 운명론 같은 건 나올 수 없다. 위기는 시장 과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경제 지형의 낯선 변화일 뿐이다.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개인·기업·국가 운명이 달라진다. 주어진 환경으로 여길 것이냐, 환경조차 깨거나 바꿀 대안을 찾아내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지 차이다.
경제팀은 가정과 전제, 조건부터 뒤집어엎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자국 중심주의로 세계화가 후퇴한다고 단념해 버리면 창의적 해법이 나오기 어렵다. 지리적 세계화가 후퇴해도 디지털 세계화는 그 반작용으로 팽창할 수 있다. 금리만으론 공급비용이 몰고온 인플레를 잡기 어렵다. 경기침체 리스크 때문이다. 비용도 흡수하고 성장도 하는 두 마리 토끼는 디지털 전환 말곤 다른 방도가 없다. 디지털 혁신을 생산성으로, 비즈니스 모델로 먼저 전환하는 쪽이 승자가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중국·인도 시장 탄생을 알리는 디지털 전환이 지정학 제약을 바꿀 열쇠인 이유다. 불행히도 경제전략에서 이런 절박성이 안 보인다.
에너지 비용이 상승할 때 한국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지정학 리스크가 큰 해외 의존도를 당연시 해온 업보다. 에너지가 기술산업으로 바뀌는 지금, 자립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국은 앞으로 수십 년간 ‘그린플레이션 악몽’에 시달릴 공산이 크다. 고정관념을 다 버리고 에너지의 새 판을 만들어내야 한다.
금융 불안도 그렇다. 한국은행 설문조사에서 국내외 금융·경제 전문가 72명 중 58.3%가 금융 시스템 위기를 초래할 충격이 1년 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통화정책이 제약조건이라는 변명이 한국이 창의적 발상을 못하는 이유의 전부일 수 없다. 금융의 글로벌화를 막는 뿌리 깊은 관치 규제도 위기의 진원지다.
위기 속에 정부가 제시한 우주 로드맵은 창조적이어야 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조차 추격자 함정에 갇혀 있음을 보여준다. 전략 없는 국가전략기술도 마찬가지다. ‘초격차’, ‘대체불가능성’이란 말을 갖다 붙인다고 전략기술이 되는 게 아니다. 우주든 국가전략기술이든 지정학 조건을 깰 신산업, 신비즈니스가 나올 수 있다는 비전이 제시돼야 한다.
현 경제팀이 저성장 쇼크를 돌파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대통령실 수석을 없애고 민관합동위원회를 만들겠다던 윤석열 정부의 약속은 온데간데없다. 부처는 대통령실만 바라본다. 과거의 틀을 깨는 전략이 나올 턱이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한국이 1%대 성장률을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봤다. 1년만 버티면 끝날 저성장이 아니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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