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명의 무고한 생명이 안타깝게 이태원에서 희생됐다. 이를 두고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과 ‘자발적으로 모인 곳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왜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엇갈렸다. 또 ‘사고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왜 나만 책임져야 하는가’라며 억울해하는 공직자도 있다. 이는 곧 ‘참사냐, 사고냐’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논란은 현대 행정학이 끊임없이 고민해온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은 정부 공직자의 민주적 정당성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영국의 공직자 행동강령은 공직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행동원칙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상명하복하는 공직자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가치를 고민하고 양심에 비춰 판단하는 공직자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공직자 행동강령은 공직의 가치를 이야기하기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나열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공직자들의 모습은 공공성, 공적 가치 등에 대한 고민 부족을 보여준다. 국민과 국가의 관계, 정부의 역할 등의 가치 판단이 부재하기에 억울해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옳지 않다. 우리 시민은 자발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국가의 규제와 법규를 지키고 있으며 묵묵히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국가와 공무원이 개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민과 국가 간의 암묵적인 계약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책임과 국가의 책임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공공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사고에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는 국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인도를 걷다가 다치는 경우 국가에 상해배상 책임을 요청할 수 있는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다.
공직자의 책임도 마찬가지다. 공직자가 누리는 엄청난 권한과 사회적 존경은 당연한지 반문해 봐야 한다. 공직자의 자리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고 책임지는 자리여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경찰 배치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누군들 폼나게 사표 던지고 싶지 않겠냐’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말에 국민은 전혀 공감할 수 없다.
사회 재난은 오랫동안 축적된 위험 요소가 임계점을 넘어 현실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일상에 숨어 있는 위험 요소는 없을까.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과 광역버스의 혼잡 문제도 언제 재난으로 돌변할지 모른다. 보안에 대한 열악한 투자는 해킹으로 하루아침에 금융망이 붕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행정부와 공공기관이 반성과 성찰을 통해 우리 사회에 숨어 있는 위험 요소를 진단하지 못하면 재난은 또다시 발생할 것이고 ‘국가가 예방할 수 있는 재난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되풀이될 것이다.
무엇보다 지도자의 통렬한 자기반성 없이는 일선 공무원과 시민의 자기성찰을 이끌어낼 수 없다. 정치인과 정부 각료 역시 일선 공무원 질책과 처벌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얼마 전 워싱턴포스트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사진과 함께 그들의 소중했던 삶을 추억하며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사를 낸 적이 있다. 아픈 기억은 그저 회피하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억해야 한다. 정부와 시민이 함께 안전사회를 만드는 책임을 지며 노력하는 것이 떠나간 분들의 삶을 살아남은 자들이 의미 있게 추모하는 방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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