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당오락(四當五落)’이란 말을 했다. 네 시간 자고 공부하면 대학에 붙고, 다섯 시간을 자면 떨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창때의 고등학생도 견디기 어려운 이런 생활 방식으로 지난 20여 년간 그림만 그린 사람이 있다. ‘사과 작가’ 윤병락(54)이다. 가족과의 식사시간(2시간)과 수면시간(4시간)을 제외한 하루 18시간을 딱 하나의 주제, 사과만 그렸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잠도 작업실에서 잤다. 이렇게 그려낸 사과는 캔버스에서도 마치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듯 생생하다. 그림 한 점당 가격이 수천만원에 달하는데도 그의 작품을 사려는 미술 애호가들이 줄을 서는 이유다.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윤 작가의 개인전에는 극사실주의로 그려낸 사과 그림 17점이 나왔다. 상자에 담긴 탐스러운 빨간 부사, 청량한 느낌을 주는 아오리 사과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2004년부터 사과를 그렸으니 올해로 사과를 그린 지 19년째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과 그림이 어려워서 실물이나 자료 사진을 꼭 봅니다. 같은 품종이라도 익어가는 모양과 색깔, 굴곡 등이 제각각이거든요. 자료를 보지 않고 그리면 이런 디테일과 차이를 살릴 수 없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마다 사과를 다섯 상자씩 삽니다. 다 그린 후에는 주변에 나눠주지요.”
그의 작품에서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캔버스다. 직사각형의 캔버스 대신 사과 상자나 접시 모양, 벽면을 배경으로 삼은 듯한 모양 등 자유자재의 캔버스가 그림의 틀이 된다. 사과를 감싸고 있는 한국경제신문 지면이 상자 밖으로 삐져나온 모양도 그대로 캔버스 테두리로 쓰인다.
“대학 시절부터 직사각형 캔버스에 얽매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여러 시도를 했어요. 그러던 중 접시 모양 캔버스에 담긴 사과를 그렸는데 반응이 아주 좋더군요. 그 후 다양한 모양의 ‘변형 캔버스’에 사과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윤 작가는 캔버스를 스스로 만든다. 직접 깎은 나무판에 한지를 붙이고 밑칠을 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품이 많이 드는 극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데다 캔버스도 손수 만들다 보니 작은 작품 한 점을 그리는 데도 1주일 넘게 걸린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그가 ‘수도승 같은 생활’을 시작한 이유다.
윤 작가는 “친구도 많지 않고 휴가도 없이 작업실에 줄곧 산다”고 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친구들과 골프를 치는 게 유일한 사교 활동이자 운동이다.
“그래도 행복해요. 수험생처럼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제 작품을 위한 거니까요. 원래 잠이 많지 않은 체질이기도 하고요.”
윤 작가에게 향후 목표를 묻자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이제는 제 작품을 덜 팔고 좀 모아두려고 해요. 작품이 그리는 대로 다 팔려버리니 해외 전시를 하자는 제안이 와도 줄 작품이 없더라고요.” 전시는 오는 17일까지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