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사모펀드(PEF)가 KT&G 이사회에 한국인삼공사 분리 상장 등 5가지 요구를 담은 주주제안서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2002년 민영화 이후 멍에처럼 지고 있던 ‘주인 없는 회사’라는 꼬리표를 떼고, ESG 경영 실천 등을 통해 수익성을 끌어올리라는 것이 골자다.
26일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이날 새벽 플래시라이트캐피털파트너스(FCP)가 KT&G의 주요 주주인 외국계 펀드에 주주제안서 발송 사실을 외신 보도를 통해 알렸다”고 말했다. FCP는 불특정 다수의 개인 주주들을 위해 자사 홈페이지에 동일한 내용을 공지했다. 사내·사외 각각 2명, 6명으로 구성된 KT&G의 이사회에도 외신 보도 직전에 제안서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FCP는 칼라일코리아를 이끌던 이상현 대표가 만든 신생 사모펀드다. 주요 투자자는 싱가포르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FCP가 홈페이지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이 대표는 KT&G 경영진과 약 4개월 전부터 5가지 주주제안에 관해 논의했다. 5가지 제안은 궐련형 전자담배(HNB) ‘릴’을 글로벌 브랜드로 키우기 위한 중장기 전략 수립, 한국인삼공사 인적 분할 후 분리 상장, 2조원가량의 비핵심사업 정리, 주주환원 정책 확대, 행동으로 보여주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이다.
IB업계 관계자는 “2003년 경영권 인수를 전면에 걸었던 칼 아이칸과 달리 FCP는 KT&G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주주제안서 발송을 통해 이사회의 결단을 촉구하려는 차원”이라고 해석했다. KT&G의 주주라고 밝힌 FCP의 현재 지분율은 3% 미만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 KT&G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KT&G 경영진이 조만간 인삼 사업 글로벌 전략을 담은 중장기 비전을 발표할 예정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KT&G는 민영화 직후인 2003년에 적대적 M&A 위협에 노출된 바 있다. FCP는 칼 아이칸류의 ‘기업 사냥꾼’이 아닌 최근 글로벌 투자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는 ‘착한 행동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사회와 주주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킴으로써 기업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내에선 BYC 경영 참여를 선언한 트러스톤자산운용이 대표적이다. 가치투자 1세대인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의장도 행동주의 펀드를 만들며 최근 시장에 복귀했다.
칼 아이칸이 경영권 인수를 전면에 걸고 시세차익을 노렸던 것과 달리, FCP가 KT&G 경영진에 요구하는 사항은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라는 것이다. 백복인 KT&G 사장 등 주요 임원들에 대한 스톡옵션 부여를 주주제안서에 포함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회사 가치를 끌어올림으로써 경영진과 주주가 동시에 만족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상현 대표는 홈페이지에서 “현재 KT&G의 주가는 (기업의 실질 가치에 비해) 무려 50% 할인된 가격”이라며 “향후 1년 내 2배, 5년 내 5배까지 오를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25일 종가 기준 KT&G의 주가는 8만9400원이다. 52주 신고가를 갈아치울 정도로 무서운 상승세다. 다만 2016년에 한때 14만원에 근접했던 것을 감안하면 여전히 낮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FCP가 주목하는 KT&G의 최대 잠재력은 ESG 경영이 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기업이라는 점이다. 매출의 절반 이상을 HNB로 대체함으로써 건강·환경(E)에 기여할 수 있고, 인삼공사의 세계화를 통해 인삼 농가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도와주는 사회적 가치(S)도 실현할 수 있다는 논리다. 경영진에 대한 스톡옵션 부여(G)는 E와 S를 실현할 수 있는 보조 장치라는 것이 FCP의 설명이다.
실제 HNB는 글로벌 담배업계의 격전지로 부상하고 있다. 담뱃잎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찜 방식으로 사용자를 만족시키는 ‘담배업계의 전기차’로 불린다. KT&G는 수증기를 마치 연기처럼 뿜어낼 수 있도록 고안하는 등 HNB의 최대 약점으로 꼽혔던 이물감을 최소화하는 등 HNB 연구·개발(R&D) 역량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