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엔이 안전자산에서 투기 대상이 됐다”고 보도했다. FT는 ‘약한 통화가 국가의 미래를 약화시킨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기록적인 엔저는 미·일 금리 차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며 이 같은 분석을 내놨다. 기축 통화인 엔화가 투기꾼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것과 관련해 일본 내에서도 미국 중앙은행(Fed)의 자이언트스텝(금리 한 번에 0.75%포인트 인상)에 따른 ‘킹달러’ 현상보다 일본의 구조적 문제 탓이라는 자성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고 한다.
일본 정부가 지난 21~22일 심야 외환시장에 기습적인 ‘복면 개입’을 했지만, 약발은 며칠 못 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일본 주요 은행과 증권사는 달러당 엔화 환율이 당분간 145~155엔에서 움직일 것으로 보고 있다.
엔화 급락세는 허약해진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을 반영한다. 극심한 저출산·고령화 속에 산업 구조개혁을 통한 경제 체질 개선은 외면한 채 마이너스 금리 및 무제한 양적완화에 매달린 아베노믹스 탓이다. 아베의 세 화살 중 무제한 양적완화와 공격적 재정지출의 외상값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구조개혁마저 실패하면서 일본 경제는 치명상을 입었다.
엔저가 가져다주는 ‘공짜 이익’에 중독된 일본 기업들은 글로벌 트렌드인 디지털 전환과 신기술 개발, 성장산업 투자를 소홀히 하다가 첨단 산업 주도권을 한국을 비롯한 미국 대만 중국에 내줬다. 경제안보 시대의 핵심 품목인 반도체·배터리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LG에너지솔루션 등에 시장을 빼앗겼다.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 도요타를 보유했지만, 모빌리티산업 격변기에 전기차 전환에 뒤처지면서 현대자동차·기아에 밀리고 있다. 무담보·무이자 대출을 통해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까지 연명시킨 결과 좀비기업이 급증했다.
일본 정부가 무제한 돈 풀기에 나서면서 국채 잔액이 1000조엔을 넘겼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60%에 달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채의 대부분을 일본은행(BOJ)과 시중은행, 연기금, 가계 등 자국민이 들고 있어 섣불리 금리도 못 올리는 등 진퇴양난이다.
일본의 위기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도 환율 상승·무역적자 확대 속에 성장률 정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생산·소비·투자는 물론 수출마저 줄어드는 가운데 올 들어 무역적자가 338억달러로 사상 최대다. 지난 5년간 한국의 국가부채는 주요 선진국보다 2.5배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정부 부채비율이 2060년 150.1%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와중에 경제와 기업에 활력을 불어넣을 정부의 감세안과 반도체특별법은 거대 야당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러다 한국이 일본보다 더 빨리, 더 심각한 국면으로 추락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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