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등 전문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의 간판 이가영(23)에게 늘 따라다닌 꼬리표다. 2019년 정규투어 데뷔 이후 총 4번의 준우승을 거뒀지만 우승은 한번도 올리지 못하면서 붙은 별명이다.
이가영이 이 꼬리표를 시원하게 떼어냈다. 16일 전북 익산시 익산CC(파72.6641야드)에서 막내린 KLPGA투어 동부건설 한국토지신탁 챔피언십(총상금 10억원)에서 최종승점 49점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다. 투어 데뷔 4년차, 98개 대회만에 올린 첫 우승이다.
이가영은 아마추어 시절 이름을 날리던 유망주였다. 15살 때인 2014년 처음 국가 상비군에 발탁된 이후 2017년까지 5년간 내내 국가대표, 또는 국가상비군 자리를 지켰다. 또 국내외 아마추어대회에서 6승을 올리며 ‘될성 부른 선수’로 꼽혔다.
하지만 정규투어 데뷔 이후 시련이 시작됐다. 아마추어 시절 라이벌이었던 동갑내기 최혜진(23)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이가영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가영이 완전히 부진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10번의 톱10을 기록했고, 올 시즌 들어서는 준우승 2번, 톱10 6번을 기록했다. 대부분의 대회에서 리더보드 상단에 오르며 우승 후보로 꼽혔다.
다만 마지막 ‘한 방’인 우승이 없었다. 대회 내내 선두를 다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우승을 놓쳐치곤 했다. 평소 주변을 잘 배려하고 예의바른 성품으로도 유명하기에 그에게는 “뒷심이 부족하다”, “독한 면이 없어서 우승을 못한다” 등의 말이 따라다녔다.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이같은 평가가 나와도 이가영은 특유의 선한 미소를 지으며 “우승에 지나치게 조바심 내기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겠다”고 답하곤 했다.
이번 대회는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이가영이 내놓은 완벽한 반박이었다. 이번 대회는 KLPGA 투어에서 유일하게 변형 스테이블포드 형식으로 진행됐다. 앨버트로스 8점, 이글 5점, 버디 2점을 주고 파는 0점, 보기는 -1점, 더블보기 이상은 -3점 처리된다. 각 홀마다 자신이 기록한 타수에 따른 점수를 합산해 순위를 가리는 방식이다. 잘친 샷에 대한 보상이 후한만큼 선수들로서는 무조건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 밖에 없다.
이날 “너무 착해서 우승 못하는 이가영”은 없었다.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해 공격적인 플레이로 동반자들을 압박하는 골퍼만 있었다. 이가영은 밸런스가 좋은 골퍼로 꼽힌다. 비거리, 아이언샷 정확도, 퍼팅을 골고루 잘한다. 침착한 성품으로 크게 동요하지도 않는다. 이같은 장점은 이번 대회에서 큰 시너지를 냈다. 정확하면서도 날카로운 샷으로 나흘 내내 10점이 넘는 승점을 쌓았다.
뒷심이 부족하다는 세간의 평가도 단번에 뒤집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만 버디 8개를 쓸어담으며 ‘닥공 퀸’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날 임진희(24)에 1점 뒤진 2위로 경기를 시작한 이가영은 전반에만 버디 4개를 쓸어담으며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다. 이후 10번홀(파5), 11번홀(파4)에서 연속 버디를 잡으며 단숨에 점수차를 벌리며 일찌감치 승기를 잡았다. 내내 보기없는 경기를 펼치다가 마지막 홀 두번째 샷에서 뒤땅을 치며 보기를 기록한 점이 다소 아쉬웠지만 우승을 확정짓는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가영은 상금 순위, 대상 포인트 등 개인 타이틀 부문에서도 순위를 대폭 상승시켰다. 우승 상금 1억8000만원을 획득한 이가영은 시즌 누적 상금 5억7489만2580원을 기록, 상금 순위 17위에서 8위로 훌쩍 뛸 전망이다. 대상 포인트도 14위에서 10위(317점)까지 오를 것으로 보인다.
시즌 2승에 도전한 임진희는 44점으로 준우승을 차지했다. 뼈아픈 역전패를 당했지만 이가영의 버디에 박수를 보내고 마지막 스코어 보드를 제출하면서도 축하를 아끼지 않는 등 멋진 매너를 보였다. 이번 대회에서 첫 우승을 노린 신인상 0순위 이예원(19)은 단독 3위(41점)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