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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서 연구개발(R&D)에 종사하는 직원들 절반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대학 교수나 정부 출연연구소 연구원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대내외적 복합 위기와 장기 저성장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선 '파괴적 혁신 기술'이 필요한 만큼 기업 연구자들에 대한 사기 진작 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회장 구자균 LS일렉트릭 대표·사진 앞줄 가운데)는 기업 소속 연구자 203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렇게 나타났다고 13일 밝혔다. 산기협은 국내 4만여 개 대·중견·중소기업 부설 연구소를 지원하는 단체다.
산기협에 따르면 '대학과 출연연구소 연구자와 비교한 경제적 보상 수준'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22.3%만 '좋은 편'이라고 답했다. 42%는 '부족하다'고 답했고 35.7%는 '보통(차이 없음)'이라고 했다.
'대학과 출연연 연구자와 비교한 사회적 평판'에 대한 인식은 이보다 더 나빴다. 19.2%만 '높은 편'이라고 답했다. '다소 낮은편'이 31.6%, '보통'은 34.6%였다. 14.6%는 '매우 낮은 편'이라고 답했다. 10명 중 약 5명이 '낮은 편'이라고 응답한 셈이다.
정부가 우선 추진해야 할 시책을 묻는 질문엔 △기업이 아닌 연구자 개인에 대한 세금 감면 혜택 △우수 연구자에 대한 정년 연장 △정부 훈장·포상 대상을 팀장·임원급이 아닌 직원으로 확대 △직무 발명 보상금 확대 등 답변이 나왔다.
산기협은 이날 국회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 박성중 의원 등과 함께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기술개발인 사기 진작 방안 마련을 위한 포럼'을 열고 관련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날 주제 발표에 나선 장석인 태재아카데미 연구위원은 "기업 혁신 현장의 최소 단위에서 최고의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연구자에 대한 동기 부여와 사기 진작을 위한 인센티브 설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 연구위원은 물리학자·수학자이자 경영 컨설턴트인 사피 바칼이 내세운 개념 '룬샷(미친 생각)'을 인용하며 룬샷을 살릴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룬샷은 불리한 판도를 일거에 뒤집을 파괴적 혁신 기술의 촉매가 되는 기초과학 아이디어을 말한다. 처음 접할 땐 비현실적이고 어처구니 없는 발상같지만, 결국 이를 기술로 현실화시키는 국가나 기업을 '최종 승자'로 이끄는 힘이다.
독일에 밀리던 2차 세계대전 전세를 바꾼 미군의 레이더 탐지 기술이나, 2차 세계대전에 종지부를 찍은 핵폭탄이 바로 수 십년 연구개발 끝에 탄생한 룬샷의 대표적인 사례다. 레이더와 핵폭탄 모두 물리학자, 수학자 등 기초연구자들이 주도한 미국 백악관 직속 과학연구개발국(OSRD)에서 탄생했다.
이어진 패널토론에서 송대섭 네이버 이사는 "기업 연구자에겐 사회적 인정이 경제적 보상 못지 않은 중요한 동기부여로 작용한다"며 사내 사례을 예로 들었다. 석상옥 네이버랩스 대표가 지능형 로봇빌딩인 네이버 제2사옥(1784) 내 5G(5세대 이동통신) 특화망 구축 등에 대한 공로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은 사실이 사내 화제가 되면서 연구자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미국 스티븐슨-와이들러 기술혁신법을 벤치마킹해 '기술 개발인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고 기업 연구자에 대한 훈장과 포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소기업을 대표해 참석한 이동준 지투파워 최고기술경영자(CTO)는 "현재 정부 훈포상 기준으론 중소기업 연구자가 선정되기 어렵다"며 국내 전체 기업 수 99%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에 대한 훈포상 범위를 넓혀달라고 촉구했다. 그는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이공계 학사학위 보유(대학 졸업) 우수 연구자들에게 정부가 '과학기술인 인증'을 부여해 자긍심을 높이는 방법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산기협은 오는 24일을 '기술 개발인의 날'로 정하고 이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도록 정부에 건의하기로 했다. 10월 24일은 1981년 과학기술처(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기업의 기술 혁신을 장려하기 위해 처음으로 기업부설연구소 인정 제도를 도입한 날이다.
이해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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