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정부에서 여의도나 시민단체로 가버렸다. 이대로 가면 정부가 정책으로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이관섭 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은 2016년 퇴임식에서 34년 관료생활을 마무리하며 후배들에게 이같이 말했습니다. 얄궂게도 예견은 자기 자신의 미래를 겨냥했습니다. 3개월 뒤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으로 부임했지만,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민단체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본격화된 '탈원전'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옷을 벗은 것입니다.
이 전 차관은 한수원 사장 퇴임식에서도 "원자력 발전 안전에 대한 과학적 믿음에서 벗어나 근거 없이 부풀려지고 과장된 어떤 불안감을 해소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며 탈원전을 분명하게 반대했습니다. 훗날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이 그를 교체 검토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원전 강국'을 표방한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이 전 차관은 다시 한 번 관직에 나설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난 8월22일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고 이 자리에 이 전 차관이 임명된 것입니다. 이후 국정기획수석으로 직책이 바뀌며 그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 전반을 책임지게 됐습니다.
'산업·에너지' 전문가 … 청와대·여당에서 정무감각 갖춰
이관섭 국정기획수석은 행정고시 27회 출신의 정통 관료입니다. 경북 경주에서 출생해 대구 경북고,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행정학 석사도 수료했습니다.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정만기 한국무역협회 상근부회장 등이 입부 동기입니다.상공부(산업통상자원부의 전신)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지식경제부 산업경제정책관, 에너지사업정책관, 에너지자원실장과 산업부 산업정책실장, 1차관 등을 지낸 에너지·산업통으로 꼽힙니다.
이 수석이 국정기획수석으로 임명되자 대통령실 안팎의 시선은 엇갈렸습니다. 정통 관료 출신의 정책 전문성을 기대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공무원인 그에게 정무감각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국정기획수석실 직원들은 "정책에 대한 이해와 함께 충분한 정무 감각을 갖추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국정기획수석실 한 관계자는 "여러 정책들을 한꺼번에 흝어보면서도 문제 소지가 있는 정책은 바로 짚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전했습니다. 내부 직원들에게는 인자한 '덕장(悳將)'이지만 부처 공무원들에게는 호통을 서슴지 않는다는 전언입니다.
이 수석은 산업부에서 관료생활을 오래 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비서실에서 다년간 근무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청와대 사회복지수석실에서, 1998년 김대중 정부 교육문화수석실에서 행정관으로 일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는 4개월 간 선임행정관으로 류우익 대통령 비서실장을 보좌하기도 했습니다.
2011년에는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에서 수석전문위원을 맡았습니다. 수석전문위원은 주로 당정 간의 정책을 조율하는 역할을 합니다. 정치권 인사들과 관계를 넓힐 수 있어 고위직으로 나아가기 위한 주요 보직이기도 합니다.
정책 혼선 줄었다 … "그물망 던져 잡은 정책, 작은 생선 굽듯이"
최근 윤석열 정부의 큰 변화 중 하나는 '정책 혼선'이 줄었다는 점입니다. 뉴욕 순방 기간 중 빚어진 '비속어' 논란이 한 차례 정치권을 휩쓸고 지나가긴 했지만, 정부 출범 초 벌어진 △치안감 인사 번복 △주 52시간 개편 혼선 △입학연령 하향 논란 등의 정책 혼선은 줄었다는 평가가 여권에서 나옵니다.그 배경에는 최근 대통령실의 조직 개편이 있었습니다. 지난 8월 정책기획수석실을 신설하고 9월 국정기획수석실로 개편하면서 대통령실이 각 부처 정책을 세밀하게 관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실 한 관계자는 "그물망을 여럿 던져놓았더니 크게 정책적인 실수가 없었다. 각 부처마다 앞으로 추진할 정책을 미리 보고하라고 해서 문제가 생길만한 소지를 들여다보는 중"이라고 전했습니다.
대통령실은 발표를 한두 달 앞둔 주요 정책을 보고받으며 리스크 관리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수석은 임명 당시 "나라의 큰 결정을 하거나 작은 결정을 할 때도 작은 생선을 구울 때처럼 신중한 자세로 정책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이라는 각오를 밝혔습니다.
대통령실이 직접 컨트롤타워를 맡으며 정책 리스크는 줄었지만, 동시에 윤 대통령이 공언한 '책임 총리·장관제'의 취지 역시 퇴색됐다는 게 내부의 평가입니다. 대통령의 한 참모는 "책임총리제를 해봤더니 책임은 장관이 지는 게 아니라 대통령이 결국 지더라"는 내부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최근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이 이 수석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도 정책 리스크 관리 차원으로 해석됩니다. 유 총장은 지난 5일 이 수석에게 서해공무원 피격 사건 감사와 관련해 "오늘 또 제대로 해명 자료가 나갈 것"이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다만 감사원은 일반 부처와 달리 독립된 헌법 기관입니다. 대통령실이 직접 업무 지시를 내렸다면 이는 감사원법 위반이 될 수 있습니다. 감사원법 2조 '감사원은 대통령에 소속하되, 직무에 관하여는 독립의 지위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수석이 받은 문자는 단순 문의에 대한 답변이라는 게 대통령실의 설명입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문자 내용을 보면 정치적으로 해석할만한 그 어떤 대목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야당은 "대통령실-감사원 내통 게이트"라며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탈원전에 이어 다시 한번 여야의 정쟁 한 가운데에 휘말린 이 수석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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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